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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Oct 04. 2024

4. 꿈속의 소년


 호수 주변을 촘촘히 둘러싼 나무들은 추운 곳에서 자라는 침엽수와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활엽수가 불규칙적으로 섞여 있었다. 또한 호수와 호수 부근은 한여름에 함박눈이 퍼붓기도 하고 한겨울에 꽃이 피고 과일이 열리기도 했다. 


 그 영향인지 솜다리 여관이 있는 언덕배기에는 사계절 내내 솜다리 꽃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졌다. 


 겨울답게 눈발이 나부끼는 여관 마당에 내려선 시스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눈송이가 묻은 솜다리 꽃을 만지작거리던 시스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랑 같이 와 보기로 했는데 나 혼자 왔네.”


 닫았던 말문을 다시 연 것이었다. 


 솜다리 여관은 규모가 크고 호화로웠다. 여관은 신비한 현상에 둘러싸인 요정의 호수와 신성한 숲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볐다. 


 시스가 아직 어렸기에 앙켑세라는 침대가 두 개인 크고 고급스러운 방을 잡았다. 일찌감치 사람을 보내 예약해 놓았던 것이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시스가 오밤중에 눈을 떴다. 시스는 몸을 일으켜 후드 달린 망토로 몸을 감쌌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방을 나가기 전 시스는 자신의 침대를 보았다.


 곱게 누워 자고 있는 건 분명 자기 자신이었다. 


 “내가 둘이네? 아아, 꿈이구나.”


 무심코 중얼거린 시스가 앙켑세라의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깊게 잘 자고 있었다. 


 이 꿈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시스는 알지 못했다.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의 여관은 고요했고 복도에도 계단에도 인적은 없었다.


 시스는 여관 건물의 출입문을 열고 밤눈이 내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쌓인 눈을 밟고 걸으면서 비로소 알았다. 신발을 깜빡 잊어서 맨발이라는 걸.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꿈속이니까. 


 솜다리 꽃 위로 눈이 쌓이는 마당과 길을 지나 호숫가의 나무들 사이로 시스는 서슴없이 걸어 들어갔다. 


 호수의 수면은 달빛도 별빛도 없는 하늘 아래 검고 잔잔하게 흔들렸다. 물결치는 소리가 희미하면서도 맑게 찰박였다. 마치 시스를 부르는 것처럼. 


 홀린 듯이 호수를 향해 가던 시스는 커다란 석귤나무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얀 꽃이 별처럼 피어 있었고 꽃 사이로 드문드문 익어가는 석귤도 보였다. 


 꽃과 열매가 한꺼번에? 그러나 이상할 것은 없었다. 여기는 님파 라쿠스고 또한 꿈속이니까. 


 저도 모르게 꽃을 따려고 손을 뻗은 시스는 ‘아얏’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손으로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석귤나무의 크고 억센 가시에 찔린 손가락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따려던 꽃보다 조금 아래에 매달린 꽃에 빨간 점처럼 피가 묻어 있었다. 시스는 그 꽃을 물끄러미 보다 석귤나무를 지나쳐 물가로 갔다. 석귤나무의 가지가 머리 위에 드리워 있었다. 


 무얼 기다리는지 모르는 채로 시스는 가만히 기다렸다. 


 얼마나 거기 서 있었을까? 첨벙, 무언가가 호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스는 눈 덮인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물에서 건졌다. 


 “석귤이잖아?”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크고 잘 익은 석귤이었다. 기묘한 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서 건진 석귤에 따뜻함이 감돈다는 것이었다.


 시스는 석귤을 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관이 가까워졌을 때 시스는 마당 옆 전망대의 난간 쪽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쪽도 아이인 듯했다.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야? 춥고 눈 오는 밤에?”


 자박자박 다가가던 시스가 낮은 소리로 말을 시켰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시스와 비슷하게 후드 달린 망토 차림인 그 아이는 대답 대신 후드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가렸다. 시스보다는 키와 덩치가 큰 남자아이였다. 


 ‘울고 있었구나.’


 그의 후드 속에 감춰진 비애와 고통이 시스에게 전해졌다. 놀라우리만치 고스란하게. 그래서 시스는 역시 이건 꿈이라고 한 번 더 확신했다. 


 “얼어붙은 루쿠스를 보고 있었던 거야?”


 호수 가운데의 신성한 숲은 온통 얼음 결정에 휩싸여 있었다. 꼭 물에 뜬 한 송이 흰 꽃과 같이.


 “아이스 플라워 같아. 아름답지만 차갑고 강인한 아이스 플라워. 그렇지?”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는 이가 어머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시스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서 나왔다. 


 남자아이는 계속 말이 없었다. 하지만 시스의 말을 듣고 있다는 표시로 언 숲을 건너다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얼마 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내리는 눈을 흔적 없이 녹이는 어두운 호수와 소복소복 쌓이는 눈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얼음 숲을 바라보며 나란히. 단지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주는 단순한 위로를 느끼며. 


 “너무 오래 있지 마. 감기 걸릴라.”


 먼저 자리를 뜨면서 시스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이번에도 대답은 듣지 못했다. 


 저만치 가던 시스는 한 손으로 석귤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망토 주머니 속을 뒤졌다. 곧잘 거기 넣어 다니곤 하는 과일이 손에 잡혔다. 미소를 띤 시스가 주머니 속 과일을 꺼내 들고 뒤돌아 남자아이를 불렀다. 


 “얘.”


 그가 시스를 향해 돌아서기 무섭게 시스는 과일을 던졌다. 


 “먹어 봐. 맛있어. 맛있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 같은 건 안 들 정도로.”


 남자아이는 낮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그것을 잽싸게 한 손으로 받았다.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잘 익은 배였다. 


 손 안에 들어온 배 한 알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어 짧게 말했다. 


 “고마워.”


 둘 다 후드를 깊숙이 쓰고 있었고 솜다리 여관 출입문에 걸린 등잔불은 가물거렸다. 서로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었고 나머지 반도 그림자와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시스에게 그는 꿈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시스를 유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린 기색도 없이 눈을 폭폭 밟고 가는 그녀의 맨발 때문이었다. 작은 발은 빨갛게 얼지도 않고 뽀얀 데다 걸음걸이 또한 마치 푹신한 카펫 위를 걷는 듯 편안하게만 보였다. 어딘지 현실을 벗어난 듯 보이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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