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간 시스는 레이디 앙켑세라가 여전히 곤히 자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스는 망토를 벗고 자신의 침대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따스하게 느껴지는 석귤을 안고 이내 다시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시스가 잠에서 깼을 때 앙켑세라는 방에 없었다. 덧문이 달린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눈이 그쳐 있었다. 아직 구름은 많았지만 군데군데 푸른 조각하늘이 보였다.
갠 날씨와 정돈된 침대로 미루어 짐작건대 앙켑세라는 아침 산책을 나간 듯했다.
느긋하게 잠을 더 청하려던 시스는 깜짝 놀라 침대 앞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불 가운데가 공 모양으로 볼록했다. 심지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까지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쉰 시스가 빠르고 과감하게 이불을 걷어 젖혔다.
“아니 이건, 석…… 귤?”
꿈에서 주운 그 잘 익은 석귤?
맞았다. 분명히 그 석귤이었다. 그렇다면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런데 그보다 더 시스를 심각하고 묘한 기분에 빠지게 하는 일이 침대 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석귤이 계속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껍질에 금이 쩍쩍 간 채로.
“너…… 뭐야? 정체가?”
겉은 석귤이지만 속은 석귤이 아님이 분명했다. 진짜 석귤이라면 갈라진 틈으로 솜털 같은 것들이 비어져 나올 리가 없었으니까.
단단한 껍질 속 그것은 대답이라도 하듯 ‘낑’인지 ‘잉’인지 모호한 소리를 내더니 마침내 석귤 껍질을 쩌적 가르고 튀어 나왔다.
하얀 솜털을 빽빽이 두른 동그란 그것이 앞으로 뒹굴 굴러 시스에게 가까이 왔다. 자세히 보니 주제에 한 쌍의 앙증맞은 날개까지 달려 있었다.
녀석은 날개를 파닥이며 시스에게 날아오르려 했지만 제자리에서 동동거릴 뿐 좀체 성공하지 못했다. 몸통에 비해 날개가 작아도 너무 작았다.
“내가 보인다 이거지? 눈도 있긴 있나 보네.”
시스가 녀석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유심히 관찰했다. 털 사이에 반짝이는 것 두 개가 박혀 있었다. 블랙오팔처럼 빛나는 그게 눈이 틀림없었다.
“아 맞다. 배! 그 아이!”
갑자기 생각난 시스가 녀석을 침대에 던지고 꿈에서 걸쳤던 망토 주머니를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자주 한두 알씩 넣고 다니곤 하는 배가 없었다.
시스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밤의 기억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은 동그랗고 큰 솜뭉치처럼 부화해 있는 석귤을 주운 것. 난간 앞의 남자아이. 그 아이에게 배를 던져준 것. 전부 현실이었다.
석귤 꽃에 묻었던 자신의 핏방울. 석귤을 건지기 위해 손을 담근 호수 물의 뼛속까지 얼릴 듯 시리던 감촉. 자신이 했던 얘기들과 남자아이에게 들었던 딱 한마디 ‘고마워’.
모든 장면과 감각이 몹시도 선연하고 생생했다.
혼자 파닥파닥 방방거리며 용을 쓰던 솜뭉치 녀석이 기어코 시스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녀석은 시스에게 폭 기대더니 얌전히 엎드렸다.
어쨌거나 어리고 연약한 생명이었다. 시스는 작은 손으로 녀석의 몸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시스는 황급히 솜뭉치 녀석을 이불 속에 숨기려 했다. 그러나 녀석이 화들짝 놀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레, 레이디 앙켑세라. 산책은 즐거웠나요?”
당황한 시스가 녀석을 엉덩이 뒤쪽으로 밀어 감추며 말했다.
앙켑세라가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요 며칠 동안 동행인 자신을 본척만척 상대도 않던 꼬마 레이디가 당황한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차리는 모양새가 꽤 우스웠다.
“아주 즐거웠지. 날이 개어서 님파 라쿠스와 루쿠스의 신비로운 풍경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꼬마 레이디.”
망토를 벗어 안락의자에 걸쳐 놓고 앙켑세라는 시스에게로 걸어왔다.
“왜, 왜요? 레이디 앙켑세라.”
“뒤에 감춘 거, 그게 뭐지?”
“아, 이거. 이건 그냥 그러니까…… 제 것이에요.”
“흠, 그래? 혹시 인형?”
“인형은 아니고 살아 있는…….”
“그건 곤란한데?”
앙켑세라가 팔짱을 끼고 시스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라키에사 공작과의 계약은 어디까지나 꼬마 레이디 시스를 맡아 준다는 것이었거든. 계약서에 반려동물이라든가 그런 걸 동반한다는 내용은 없었어.”
“먹이는 내가 먹을 음식에서 나누어 줄 거예요. 내 방을 같이 쓸 거고. 그럼 레이디 앙켑세라가 곤란할 일은 없지 않나요?”
솜뭉치 녀석이 무엇을 먹이로 먹는지도 모르면서 시스는 똑똑하게 대꾸했다.
“일단 어디 좀 보자. 어떤 동물인지.”
“빼앗아서 내다 버리려는 건 아니겠죠?”
두 손을 내미는 앙켑세라를 시스가 못 믿겠다는 듯 쏘아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 공작 부인이 들어오자 안면을 싹 바꾸어 자신을 홀대하던 주위 사람들을 보면서 시스는 의심과 경계심을 배웠다.
“아니. 꼬마 레이디의 것이라며? 소유자가 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물건이든 동물이든 함부로 내다 버리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시스는 입술을 앙다물고 눈에 힘을 준 채 저 말을 믿을지 말지 고민했다.
“정말이라니까. 어떤 동물인지 봐야 비용을 계산할 거 아니냐고. 꼬마 레이디와 함께 내 집에 머물게 하는 비용 말이야. 추가로 글라키에사 가에 청구할 거니까. 꼬마 레이디 혹시 그런 말 들어 봤니?”
“무슨 말이요?”
“계산은 확실히, 라고. 레이디 앙켑세라 메디우스의 삶의 모토라고나 할까.”
앙켑세라의 말을 알아듣긴 했지만 시스는 선뜻 솜뭉치 녀석을 보여주기가 꺼려졌다. 모습이 특이해서 시스가 아는 어떤 종류의 동물에도 포함시키기 힘든 녀석이었다.
‘정말 괜찮을까? 이런 이상하게 생긴 동물이라도, 앙켑세라가 원하는 비용만 지불하면?’
시스가 생각에 빠져 방심한 사이 앙켑세라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시스의 뒤에 있던 솜뭉치 녀석을 잡아채 갔다.
“꾸엥. 끼엥. 까앙.”
얼추 이렇게 들리는 소리로 울면서 녀석은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러나 앙켑세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