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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Sep 30. 2024

2. 구원의 불빛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자 성채 뒤편 아래에 있는 잡목림이 나왔다. 복잡한 숲을 토드 경은 능숙하게 헤치고 나아갔다. 


 숲이 끝나고 도로가 나왔을 때 어두운 숲과 길에 흩날리는 희끗한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었다. 


 이곳 시데레온에서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눈에는 규칙이 있었다. 한 번 시작되면 사흘 안에는 그치는 법이 없었다. 매년 한결같았다. 


 사람들은 이 눈을 몰아오는 겨울바람을 루쿠스 게미투스라고 불렀다. 신성한 숲의 한숨이라는 뜻이었다. 

 도로에 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에 매인 검은 말 두 마리가 내뿜는 콧김이 시린 새벽 공기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토드 경은 라무스를 마차 안에 태우고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라무스는 가리개를 젖혀 자신이 나고 자란 성이 시시각각 멀어지는 것을 말없이 응시했다. 


 얼마나 갔을까, 깜빡 잠이 들었던 라무스는 말 울음소리에 깼다. 마차 바깥으로 나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토드 경이 보이지 않았다. 


 와락 불안해진 라무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낮인데도 구름과 눈 때문에 눈앞이 어스름했다. 산등성이 위였고 사방은 적막했다. 눈발은 계속해서 흩날리고 있었다. 작은 새의 솜깃 같은 눈송이가 허공을 가득 날아 내려오는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아이는 오히려 무서울 지경이었다. 


 마침내 토드 경의 모습이 라무스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저만치 숲의 언저리에 서 있는 까마득히 높은 가문비나무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살피러 거기 올라갔는지는 라무스가 알 수 없었으나 저 꼭대기라면 사주 경계에 적합한 지점일 터였다. 


 “왜? 무얼 살피러 올라갔던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련님.”


 토드 경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뭐, 뭐하는 거야?”


 당황한 라무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토드 경이 라무스의 얼굴을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가리십시오.”


 “이러지 마. 그만 둬. 난 토드 경이 섬기는 주군의 후계자야.”


 어린아이치고는 꽤 위엄 있는 태도였다. 


 “얼굴을 가리시라 말씀드렸습니다만 듣지 않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토드 경이 검을 높이 쳐들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기사였다. 그가 검을 겨눈 이상 도망쳐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라무스는 잘 알았다.


 “악!”


 두 눈 똑바로 뜨고 당당하게 맞서겠다고 결심했지만 결국 라무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검은 라무스의 두 손등을 한 번에 긋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처의 모양은 새끼손가락 쪽 손날을 맞대고 손등을 볼 때 가운데가 지워진 하나의 선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토드 경이 급히 사과하더니 붕대를 꺼내 라무스의 양쪽 손등을 각각 꽁꽁 동여맸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라무스는 혼란과 통증으로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인 아이의 머리로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쪽 자작나무 숲을 가로질러 달리세요. 도련님의 걸음과 달리기로는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그래도 날이 저물기 전에는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자작나무 숲이 끝나면 여기보다 더 넓은 도로가 나옵니다. 도로가 낮아지는 방향으로 계속 가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라무스는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성으로 되돌아가고만 싶었다. 베인 손등이 너무 아팠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엘리너가 보고 싶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토드 경이 라무스를 안더니 자작나무 숲 반대편의 가문비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숲에서 도로를 따라 얼마간 전진한 토드 경이 다시 도로로 나와 건너편의 자작나무 숲에 라무스를 내려놓았다. 


 “가십시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마십시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시되 함부로 발설하지는 마십시오. 집으로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토드 경은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마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라무스는 이윽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자작나무와 눈송이의 흰빛이 뒤섞인 숲 사이로 어린 라무스의 발소리가 스며들었다. 사박사박, 울먹임 같은 발소리가. 


 무작정 숲을 가로질러 넓은 도로에 닿은 라무스는 지쳐 주저앉고 말았다. 조금 있으면 날이 저물어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질 것을 알지만 다리가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때 도로의 높은 쪽 멀리에서 아른대는 빛이 보였다. 희미한 빛은 서서히 라무스를 향해 오고 있었다. 곧이어 언 땅을 달리는 말의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라무스는 안도와 긴장으로 쿵쿵대는 가슴을 안은 채 숨죽여 기다렸다. 


 과연 마차였다. 붉누른 불빛을 흘리는 호화로운 마차가 눈 쌓이는 길을 달려 다가왔다. 라무스는 길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팔을 흔들었다. 저 마차를 얻어 타지 못하면 여기서 얼어 죽고 말 터였다. 


 말들이 히히힝 우는 소리와 함께 달리기를 멈추고 마차가 섰다. 마부가 라무스를 향해 무어라 욕을 날리면서 어서 비키라고 고함쳤다. 


 그러나 라무스는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라무스는 알고 있었다. 마부를 상대할 일이 아니라 마차의 주인을 상대해야 한다는 걸. 어린 라무스에게도 약간의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대공인 아버지를 지켜보며 자라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익힌 거였다. 


 “웬 소란이지?”


 마차의 가리개가 젖혀지더니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마차의 주인인 레이디 프레케스였다. 


 라무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자를 향해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가슴에 모았다. 태워 달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니? 아이가 혼자서 이런 곳에……”


 그녀가 물었다. 라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슬픔과 괴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몸이 떨리고 다리가 풀렸다. 라무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상에, 가엾기도 하지. 이리 오렴. 내가 널 여기 그냥 두고 간다면 내일 아침 해 뜰 무렵에는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을 텐데,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너와 비슷한 또래의 아들을 가진 어머니로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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