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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Sep 27. 2024

1. 라무스


 밤보다 어두운 새벽이었다. 

 시데레온에 겨울을 불러오는 삭풍이 불고 하늘은 두터운 구름에 가려 칠흑빛이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네 삼촌과 토드 경을 믿어야 한다. 약속할 수 있겠니?”


 갓 열 살이 된 라무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하는 아버지의 낯빛은 절박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워진 라무스는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 이제 가거라. 내 아들에게 부디 여신의 가호가 있기를.”


 “제가 어디를 가야 하는데요? 아버지는 같이 안 가요?”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언제나 해야 할 일이 많잖니. 먼저 가거라.”


 어린 라무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었다. 등을 떠미는 아버지의 손길이 떨리고 있다는 것도 그 당시에는 몰랐다. 


 “아아, 어머니한테 가는 거예요, 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라무스가 밝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라무스가 알기로 어머니는 지금 페르베아투 왕국의 왕성이 있는 카푸에 가 있었다. 카푸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티토니아 대륙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다.


 “아니. 다른 곳이야.”


 라무스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가 떠나고 벌써 여섯 달도 더 흘렀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은데. 


 “이리 오세요, 도련님. 제가 모시고 갈게요.”


 언제 왔는지 문밖에 서 있던 엘리너가 라무스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라무스의 어머니인 프리틸라의 유모였다. 


 엘리너는 라무스가 태어나고부터는 프리틸라보다 라무스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마음을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지만 이 성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안 돼, 엘리너. 라무스는 토드 경과 단 둘이 갈 것이네.”


 주군인 아세르 대공의 준엄한 말에 엘리너는 토를 달지 못했다. 늙은 엘리너는 프리틸라를 사랑하듯 대공도 사랑했다. 대공 일가족은 모두 다 늙은 엘리너의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엘리너의 눈이 금세 젖어들었다. 대공은 그런 엘리너를 향해 작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눈물을 보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라무스를 위해서. 


 “아이의 옷을 갈아입혀 줘, 엘리너. 따뜻하고 좋은 옷으로.”


 여기까지 말한 대공은 엘리너에 귀에 대고 낮게 부연했다. 


 “양쪽 가문의 문장은 물론이고 아이의 출신을 알 수 있는 어떠한 장식도 없는 옷이어야 해.”


 엘리너는 눈빛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라무스의 손을 잡고 그 방을 떠났다. 


 복도를 걸어가던 라무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왠지 아버지가 지켜보고 계실 것 같았다. 의연한 얼굴을 보여 안심시켜 드리자는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거기에 있었다. 미소를 보이며 라무스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라무스도 씩씩하게 웃었다. 


 군데군데 횃불이 밝혀져 있었지만 복도는 어둑했다. 라무스가 멈춘 자리만 바로 옆 벽에 밝혀 놓은 불빛으로 환했다. 


 아세르 대공의 뒤로는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둠이 펼쳐져 있어 그의 얼굴은 어둑하게 보였다. 아세르로서는 다행이었다. 붉어진 눈을 감출 수 있었으니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라무스는 엘리너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떠날 채비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토드 경이 나타났다. 


 “도련님을 잘 모셔요, 토드 경.”


 등을 꼿꼿이 펴고 토드 앞에 선 엘리너가 당부했다. 


 “염려 마십시오, 그래니.”


 토드가 정중히 대답했다. 이 성의 사람들은 대부분 엘리너를 그래니라고 불렀다. 존경과 친근감을 담은 별칭이었다. 


 “도련님.”


 엘리너는 허리를 굽혀 라무스를 안았다. 


 “왜 이렇게 꽉 안는 거야, 그래니. 나, 숨 막혀. 금방 돌아올게. 잘 지내고 있어. 계피사탕 너무 많이 먹지 말고. 그거 너무 많이 먹으면 치아에도 노인 건강에도 좋지 않대.”


 라무스의 의젓한 말에 엘리너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울고 싶은 대신 웃는 것이었다. 


 “그래요. 빨리 돌아오세요, 도련님. 그리고 말이지요.”


 팔을 풀고 라무스와 눈을 맞춘 엘리너가 엄숙하게 말했다. 


 “때로는 순응이 저항보다 어렵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어느 인생에나 찾아온답니다. 그 시기를 잘 겪어내야 합니다. 기억할 수 있겠지요?”


 라무스는 자줏빛이 도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엘리너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엘리너는 언제나 그랬듯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얼굴로 라무스의 청흑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손길에는 아이가 감지하기에는 어려운, 절제된 비애도 담겨 있었다. 


 지금 엘리너의 가슴속은 물이 가득 차서 곧 넘치기 직전인 항아리와 같았다. 가슴속에서 출렁이는 것은 물이 아니라 눈물이었지만.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괜찮아요. 알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그리고 하나 더. 이 성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도련님을 사랑하고 존중했지만 성 밖에서는 그렇지 않답니다. 그러니 도련님 스스로 알아보고 판별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도련님이 존중해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말이에요. 기억할 수 있지요?”


 라무스는 작고 둥근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역시 무슨 말인지 어렵다는 기색을 띠고 되물었다. 


 “판별을 못하겠으면 어떡하지?”


 “그럴 때는…… 아무도 믿지 말아요. 존중하지도 말고.”


 지켜만 보던 토드 경이 다가와 한 팔로 라무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빠른 걸음을 엘리너는 조금도 놓치지 않고 옆에서 바짝 따라갔다. 그러느라 치맛자락을 들어서 잡고는 거의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엘리너는 필사적으로 힘을 냈다. 


 토드 경은 성을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가 있는 지하실을 향했다. 토드 경의 손에 이끌려 비밀 통로로 들어서기 직전 라무스는 지하실에 오도카니 남은 엘리너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너가 아픈 무릎을 잡고 지하실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모습이 라무스가 기억하는 작별의 순간이었다. 


 “토드 경. 삼촌은? 인사를 못했는데. 혹시 비밀 통로 저쪽에서 삼촌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 성에 안 계십니다. 성 밖에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나가셨습니다.”


 라무스는 실망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터는 조용하게 가야 한다는 예감이 아이의 마음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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