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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날이 오늘은 아니니까

by 화진


다피넬은 감기를 핑계 삼아 별관으로 옮긴 지 열흘 만에 다시 본관으로 복귀했다. 자신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데세르와 시스의 사이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넬리사의 보고에 의하면 데세르와 시스는 초상화가 빌미가 되어 다시 심각하게 다투었고,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한 적도 없으며, 시스는 데세르를 철저히 피하고 있다 했다. 다피넬은 더는 거리를 두고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본관으로 돌아오자마자 다피넬은 시종장과 시녀장을 각각 데세르와 시스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이제부터 가법에 따라 아침과 저녁 식사는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세 가족이 함께 해야 한다고.


시녀장 마르타가 전하는 다피넬의 엄명을 들은 시스는 싫은 기색 없이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오늘 저녁부터 정해진 시간에 식당으로 가서 다 같이 식사를 하면 되는 거죠?”


다피넬이 별관에서 머무는 동안 시스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드물었다. 시스는 자신의 방이나 응접실, 주방 등 그때그때 기분이 내키는 곳에서 식사를 했다. 그러나 다피넬이 돌아온 마당에 계속 멋대로 굴 생각은 없었다. 시스는 불필요한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았다.


“예. 그…… 그렇습니다.”


시스의 평온하고 순순한 태도가 마르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마르타의 눈에 비친 시스는 이 저택에서 겪었던 나쁜 일들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해맑았다.


“더 전할 말씀이 없으면 그만 가도 되는데요?”


얼결에 멀뚱멀뚱 눈만 굴리고 서 있던 마르타를 시스가 일깨웠다.


“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 참, 마르타. 나 저잣거리 구경 좀 하고 올게요. 저녁 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돌아올 테니 그렇게 말씀드려 줘요.”


“저잣거리를요? 예…… 그러시면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놀란 기색을 감추려 애쓰면서 마르타가 어색하게 미소했다.


“아니, 마차는 됐어요. 말을 탈 거예요. 도망치려는 거 아니니까 그런 곤란한 표정 지을 거 없어요. 진짜로 구경 나가는 거예요.”


“그러시면 넬리사더러 안내해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약속하는데 언젠가 내가 이 저택을 떠난다 해도 그날이 오늘은 아니니까 적어도 오늘은 아무 걱정 말아요.”


당황한 마르타에게 시스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고는 앞으로 맞잡고 있는 마르타의 손을 살짝 다독였다. 마르타는 안도의 뜻인지 체념의 뜻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고개 인사를 하고 뒤돌아 나갔다.


외출 채비를 마친 시스는 승마복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시스가 복도를 지나갈 때 데세르가 서재에서 나오다 그녀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문 뒤로 숨었다. 그는 숨은 채로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시스가 복도를 지나 계단 앞으로 오자 계단의 난간을 닦고 있던 어린 하녀가 재빨리 몸을 굽혀 인사했다.


“안녕, 카렌. 그거 이리 잠깐 줘 볼래?”


카렌은 시스가 가리키는 것이 자신의 손에 들린 젖은 수건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굳어 있었다.


“괜찮으니까 이리 주고 잘 보렴.”


시스는 카렌의 손에서 젖은 수건을 빼앗다시피 가져 와 계단 난간에 걸쳤다. 그리고 카렌이 구석에 둔 광주리에서 마른 수건도 하나 꺼내 와 젖은 수건 위에 덮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뿐히 거기 올라앉아서는 난간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때? 난간 닦기 참 쉽지? 빠르기도 빠르고.”


바닥에 멋진 자세로 착지한 시스가 계단 저 위의 카렌을 향해 말했다. 카렌은 조용하지만 명랑한 웃음을 띤 채 박수를 쳤다.


“쉽고 빠르기는 하지만 저는 무서워서 안 되겠어요.”


“여기 낮은 데서부터 조금씩 연습하면 돼.”


시스는 자기가 타고 내려온 수건을 주워서 카렌에게 갖다 주었다.


“귀하신 레이디께서 어떻게 이런 재주를 익히셨을까요? 신기해요.”


“예전에 나도 다 해봤으니까. 이런 일들.”


웃음 섞인 윙크를 남기고 시스는 계단을 내려갔다.


몇 칸씩 겅중겅중 뛰어 내려가는 시스를 보던 카렌이 어느새 몇 걸음 옆에 와 있던 데세르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데세르는 입에 손가락을 대고 쉿 하며 카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다행히 카렌은 그의 뜻을 알아듣고 소리를 삼킨 채 고개만 끄덕였다.


시스가 저잣거리를 향해 말을 달리는 동안 페로가 저만치 앞서 날면서 그녀를 인도했다. 어차피 길도 외길인 데다 페로까지 있으니 시스는 거칠 것 없이 속도를 냈다.


타키툼의 저잣거리는 텔룸에 비할 바는 못 되었으나 나름의 활기가 있었다. 시스는 말을 천천히 걷게 하여 느긋이 거리를 둘러보다 화구상 앞에서 멈추었다.


말에서 내린 시스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어린 시절 초상화를 데세르에게 팔았다던 그 화구상이었지만 그 사실 때문에 방문한 건 아니었다.


“오래된 물건에 관심이 많답니다. 골동품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점원에게 다가간 시스는 넬리사가 써 준 소개장을 내밀었다. 그것을 펴본 점원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환대했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화구가 진열된 공간을 지나 문 하나를 통과하니 별세계가 펼쳐졌다. 고풍스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과 도무지 쓸모없어 보이거나 용도를 모를 오래된 물건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시스 말고도 몇 명의 손님이 더 있었으나 다들 자신의 관심사와 목적에 집중한 채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시스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고대의 문자가 쓰인 석판들 앞으로 걸어갔다. 딱히 새로운 건 없었다. 시스가 오티움에서 이미 공부한 적 있는 내용들이었다.


“저기 저 석판, 저건 아무래도 위조품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누군가가 시스의 곁에 바투 붙어서더니 즐겁게 속삭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잠깐 긴장했던 시스가 힘을 풀고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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