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상처를 낼 때 제 검에는 약이 묻어 있었습니다.”
“약? 무슨 약?”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던 라무스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디 프리틸라께서 주신 약입니다. 효능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역시 라무스의 손등을 보고 있던 토드가 말했다.
“그 말은 곧 나에게 상처를 내라는 것 또한 어머니의 지시였다는 말이지?”
라무스는 혼란스러웠다. 토드 경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고 태도 또한 차분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들은 점점 라무스를 복잡한 미로로 떠밀고 있었다. 미로 속에 진실이 있다는 보증 따위는 없었다.
“그렇습니다.”
“라크리모의 가보인지 뭔지가 나한테 있다 쳐도 약이니 상처니 하는 것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소리 말고 좀 더 합리적인 얘기는 없나?”
갑자기 토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 말씀입니다. 라크리모의 가보를 레이디 프리틸라께서 훔치셨다니, 이것보다 더 뜬구름 잡는 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명백한 모함입니다.”
라무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검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좀 들을 만한 얘기가 나오는군. 그러니까 토드 경, 우리 시데레온에 라크리모가 탐낼 만한 무언가가 있었단 말이지? 재생과 번영의 그것인지 뭔지 하는 것 말이야. 라크리모는 그걸 빼앗으려고 어머니를 모함하여 그게 본디 자기네 것인 듯 속였고?”
“제대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토드 경은 상처를 통해 나에게 약을 주입하라는 어머니의 지시를 근거로 뭔지도 모를 그것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맞습니다. 적어도 그 약이 상처 치료용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니까요. 그것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몰라도 도련님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글쎄, 나로서는 그 생각에 동의하기 힘들군. 보다시피 나는 토드 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보통의 인간이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데레온을 떠날 때 완전히 빈손이었으니까.”
토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라무스는 티토니아 대륙에서 가장 고귀하고 유서 깊은 가문인 유바론의 적통이었다. 페르베아투 왕국을 세운 라크리모조차 먼 옛날에는 유바론 휘하의 소영주 가문이었다. 티토니아의 어느 귀족 가문도 유바론의 고귀함을 부정하지는 못할 터였다. 시기는 할지언정.
그러한 사실보다 더 토드가 라무스를 특별하게 여기는 까닭이 있었다. 예전에 시데레온에서 토드는 죽어가던 식물이나 동물이 어린 라무스의 보살핌을 받고 되살아나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격했다. 프리틸라와 아세르는 우연일 뿐이라고 했지만 토드의 직감은 다르게 속삭였다.
토드의 회상을 듣고 있던 라무스가 웃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말씀대로 우연일 뿐이야. 경의 눈에 내가 특별해 보였다면 그건 경이 어린 나를 지나치게 귀여워한 탓일 거야.”
“도련님에게 무언가가 있지 않다면 라크리모 쪽에서 왜 도련님을 현상수배하면서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겠습니까?”
수배령은 시데레온과 페르베아투에서 동시에 내려졌다. 그러나 토드는 라무스의 삼촌인 테고 공이 내린 수배령은 어디까지나 가투스를 통한 페르베아투의 압력 때문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라크리모 쪽의 현상수배라는 표현에 담았다.
“어머니께서 나를 살려 달라고 이그노스 대비에게 간청하셨겠지.”
이그노스 대비는 아바루스 왕의 친모이며 프리틸라와 같은 살리그네의 피가 흘렀다. 그리 가까운 친척은 아니었으나 자손이 귀한 살리그네인 만큼 일찍부터 왕래가 있는 사이였다.
“과연 그럴까요? 탐욕스러운 아바루스가 단지 모친의 부탁 하나 때문에 눈엣가시와 같은 라무스 도련님을 살려 두겠습니까? 도련님은 유바론의 적통 후계입니다. 테고 공은 서자이시니 도련님만 없애 버리면 페르베아투가 시데레온을 흡수할 명분은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논리적인 반박이었다. 라무스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데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에게 보물인지 재생과 번영의 무엇인지가 있을 법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 손에 있을지도 몰랐다.
“시데레온으로 가셔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시고 돌아가신 아세르 대공의 원통함을 풀어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라무스의 낯빛이 어둡게 굳었다.
아세르 대공과 시데레온의 병사들은 테세라 협곡에서 페르베아투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이른바 테세라의 혈투였다. 시데레온 측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과 대대로 물려받은 전사의 정신을 토대로 페르베아투 군과 대등하게 싸웠다.
사흘의 치열한 전투 끝에 페르베아투가 들고 나온 것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술수였다. 가투스 후작은 프리틸라의 목숨을 담보로 아세르 대공의 목을 요구했다. 가투스가 든 횃불이 프리틸라가 묶인 화형대 아래의 마른 섶에 닿기 직전에 아세르는 결국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때 이후로 시데레온은 다시 어려운 시절을 맞이했습니다. 페르베아투는 가투스를 통해 내정에 간섭하고 기후마저 다시 변덕스러워졌으니 시데레온은 가장 척박하고 가난한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도련님이 나서셔야 합니다. 도련님의 몸에 흐르는 피에는 시데레온에 대한 책임이 녹아 있습니다. 설마 그걸 잊지는 않으셨을 줄 압니다.”
토드의 충언은 조심스럽지만 따끔했다.
“물론, 잊은 적 없어.”
날카로운 어조였다. 벽난로를 응시하는 라무스의 두 눈에 붉은 불꽃이 아른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라던 엘리너의 당부를 매일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새기곤 했다. 주먹곤죽이 되도록 난투하며 훈련한 밤에도, 얼어 죽을 듯이 추운 막사에서 새우잠을 청하던 밤에도,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난 뒤 주어지는 휴식의 밤에도, 요컨대 예외 없이 모든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