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2. 버드나무 숲의 노파

by 화진


플라토르라는 이름은 태고의 버드나무 숲에 사는 주술사 노파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살리그네 가는 후계에 있어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았고, 직계의 후손이 태어나면 백일이 되는 날에 태고의 버드나무 숲에 있는 옹달샘으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는 관례가 있었다.


따라서 살리그네의 딸들은 결혼해서 먼 땅으로 떠나도 출산할 때만큼은 반드시 게르미노의 살리그네 가로 돌아왔다. 프리틸라도 가문의 전통에 따라 게르미노에 있는 아버지의 성에서 라무스를 낳았다.


프리틸라와 그녀의 유모 엘리너가 숲 속에서 아기 라무스를 목욕시키고 있을 때 주술사 노파가 땅에서 솟기라도 한 듯 홀연히 나타났다. 머리카락이 눈처럼 희고 얼굴을 덮은 주름이 너무 많아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인데 등은 조금도 굽지 않아 자세가 꼿꼿한 노파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프리틸라는 황급히 아기를 자신의 품안에 숨겼다. 엘리너 역시 깜짝 놀랐으나 프리틸라와는 다른 종류의 놀람이었다. 엘리너는 노파를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거기 버드나무 숲의 옹달샘에서, 프리틸라가 백일 된 아기였을 때.


과거의 그때는 아기를 보고 미소만 지었던 노파가 이번에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여 절했다. 그 모습에 엘리너와 프리틸라는 경계심을 조금 내려놓았다. 노파는 너무 늙어서 보기에 흉했지만 주름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나 행동거지가 온화하고 정중했다.


주술사 노파는 자신이 맡아 둔 이름의 주인이 될 아기를 오랜 세월 기다려 왔다고 했다. 마침내 그 아기가 왔고 이름을 전해 주었으니 자신도 비로소 버드나무 숲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녀는 기뻐했다.


그녀는 주름진 손에 쥔 푸르고 연한 버드나무 가지로 아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프리틸라와 엘리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축복의 말을 속삭였다. 그러고는 비밀스러운 이름을 잘 간직하라고 당부한 다음 나는 듯 가벼운 걸음으로 숲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가 버렸다.


토드가 플라토르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본디 살리그네 가문의 심복 기사로 라무스의 어머니인 프리틸라의 수호 기사로서 시데레온에 왔기 때문이었다. 프리틸라는 살리그네 가를 이을 후계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녀가 영주의 지위를 물려받을 것이다.


라무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깊은 감개에 젖은 토드의 눈에 살짝 물기가 번졌다. 유바론의 늘씬하고 탄탄한 체격과 살리그네의 짙푸른 눈동자에 외조모의 생김새를 닮은 청년 주군이 위엄 서린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토드 경, 뭘 잘못 알고 있군. 나는 시데레온의 주인이 아니야. 시데레온의 대공은 테고 유바론 공이지. 그런데 그를 실질적인 통치자라고 할 수는 없겠지. 현재 시데레온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인물은 페르베아투 왕가에서 파견한 자문관 가투스 후작이니까.”


테고는 라무스의 삼촌이었다. 라무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삼촌을 믿어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씀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 새벽 이후로 시데레온과 삼촌과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이 파괴되고 변해 버렸다.


라무스는 저세상의 아버지를 향해 속으로 물었다. 계속 믿어야 할까요, 삼촌을? 저를 잡기 위해 수배령을 내리고 현상금까지 내건 삼촌을 말입니다.


“망아지처럼 뜰을 뛰어다니던 귀여운 도련님께서 그 사이 어엿한 사내가 되셨군요. 도련님의 손에 죽는 것은 아쉽지 않습니다만,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토드는 아직도 어렸던 라무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특히 눈 내리는 흰 숲 사이로 멀어지던 소년 라무스의 쓸쓸하고 연약하던 뒷모습이.


그 소년이 무사히 자라 자신을 찾는다면, 그리고 목숨을 요구한다면 그 요구에 기꺼이 응하리라는 각오로 이제껏 살아왔다. 다만 그 전에 몇 가지 라무스는 아직 모르고 있을 사실을 알려 줘야 했다.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군. 좋아. 옛 정이라는 게 있으니 잠시 들어 주지.”


사실 라무스도 십여 년 전의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의문점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토드의 입에서 의문을 푸는 데 도움될 만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시면 누추하더라도 안으로 드시는 게 낫겠습니다. 저쪽입니다.”


토드가 대장간 안쪽에 있는 자신의 거처를 가리켰다. 벽난로가 타고 있는 작은 방이었다.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오래된 나무 탁자에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혹시 궁금하신 것이 있으셨다면 질문하십시오.”


“이것 말이야.”


라무스가 장갑을 벗고 손등의 흉터를 토드의 앞에 내밀었다. 두 손등을 잇는 한 줄의 상흔은 아른거리는 불빛 속에서도 선명했다. 토드는 가시에 찔린 사람처럼 움찔하며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를 죽이려던 거였나? 그럴 작정이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나?”


토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을 해칠 생각이었다면 결코 마음이 약해지거나 바뀌거나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제 임무는 도련님을 무사히 도망시키는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왜 그랬지?”


검으로 손등을 긋고 나서 곧바로 약을 발라 주던 지난날의 토드의 행동을 떠올리며 라무스가 석연치 않다는 듯 물었다.


“그건…… 내막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련님이 아셔야 할 다른 일과도 연관되어 있으니 그 일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때 가서 해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 치고, 왜 나를 그 숲에서 버렸지? 내가 알아낸 바로 토드 경은 나를 텔룸으로 데려갔어야 해. 오티움의 총장인 리마토에게로 말이야.”


“그건 돌아가신 아세르 대공의 계획이었고, 제가 실행한 건 레이디 프리틸라의 명령이었습니다. 도련님이 그 숲을 제 때에 건너가시면 마찻길에서 도와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전날 저녁 레이디의 전서매가 가져온 전갈에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계획을 어머니가 망쳤다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라무스가 의심의 눈초리로 토드를 쏘아보았다.


keyword
이전 01화31. 그의 이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