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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라크리모의 가보

by 화진


“어머니는 그때 카푸에 연금되어 계셨는데 어떻게 내가 마찻길에서 도움을 받을 줄을 아셨다는 거지? 어머니께서 미래를 보는 예언자라도 된단 말인가?”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레이디 프리틸라께는 은밀한 협력자들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페르베아투나 시데레온 뿐 아니라 티토니아 전역에 걸쳐서 말입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정보를 얻으셨겠지요.”


“은밀한 협력자?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어머니와 헤어지던 당시의 라무스는 아직 철없는 아이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멀리 떨어져 살아왔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라무스가 잘 알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연하지만 서글픈 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해야 마땅했던 시간을 빼앗긴 채로 라무스는 성년이 되어야 했으니까.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면 마땅히 받았을 지극한 사랑과 소중한 가르침들 그리고 함께 나누어야 했던 웃음과 행복을 고스란히 잃은 채로.


“저도 거기까지밖에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레이디 프레케스는? 내가 마주친 게 그녀의 마차였던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그녀도 어머니의 숨은 협력자였나?”


“아마 우연이 맞을 겁니다.”


토드의 말에 라무스도 수긍의 눈빛을 보였다. 자신을 구해주던 때의 다피넬의 태도나 이번에 다시 조우했을 때의 반응을 고려했을 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제가 지켜보기로 그 마님의 관심사는 딱 한 가지입니다. 아드님이신 데세르 공의 건강 문제 말입니다. 그것 외에는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외부와의 교류도 거의 없습니다.”


잠깐의 침묵 뒤에 토드가 덧붙이자 라무스가 가볍게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하더군.”


지난 며칠 동안 프레케스 저택에 머물렀던 라무스의 눈에 비친 다피넬의 모습과 토드의 판단이 일치했다.


“그 말씀은…… 프레케스 마님을 만나셨습니까?”


놀란 눈으로 토드가 물었다.


“클레멘스 사제에게 용무가 있어서 신전에 들렀다가 마주쳤는데 나를 기억하고 있었어.”


라무스가 손등의 흉터를 들어 보이며 간단히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자, 다시 중요한 얘기로 돌아가지. 토드 경, 말해 봐. 어머니가 나를 두고 아버지와 다른 계획을 세우신 까닭이 뭘까?”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니 저는 모릅니다. 다만 추측해 보건대 아세르 대공의 계획이 레이디 프리틸라께는 불안하게 느껴졌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대공께서 오티움에 재학 당시 리마토 총장이 대공을 각별히 아끼셨던 건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런 만큼 아세르가 아들을 빼돌렸다면 도피처로 오티움을, 후견인으로 리마토를 선택했을 가능성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려던 건 텔룸이 중립 도시이고 오티움이 불가침의 성역이기 때문이 아닌가. 리마토 총장은 모든 귀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고. 그러니 설령 내가 오티움의 리마토에게 가 있다는 것이 밝혀져도 페르베아투의 왕가에서 함부로 어찌하지는 못했을 텐데. 토드 경은 어째서 어머니가 불안해 하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라무스가 말을 마쳤을 때 벽난로의 모닥불이 풀썩 흐트러졌다. 장작이 거의 타서 숯이 되는 바람에 형체가 무너진 것이었다. 라무스는 재빨리 일어나 장작을 더 넣은 다음 장작 하나를 쥐고 숯을 쏘삭여 불길을 살려냈다.


익숙한 솜씨로 불을 되살리는 라무스를 토드가 씁쓸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청년 주군의 손은 더 이상 연하고 가지런했던 아이의 손이 아니었다. 무기와 잡일로 단련된 굳은살투성이의 강인한 손이었다.


“만약 페르베아투의 왕족 라크리모 가의 주장대로 ‘그것’을 도련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면 도련님을 노리는 자들이 라크리모 외에 더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 그것이 뭐지? 나는 시데레온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어. 토드 경도 알겠지만. 아니 잠깐, 혹시 그것이 그 라크리모의 가보라는 그거야? 페르베아투가 시데레온을 침략하는 구실로 삼았던 것. 라크리모가 유바론을 친 이유가 되었던 것 말이야.”


십여 년 전의 그 새벽에 어린 라무스를 떠나보낸 아세르 공작은 곧장 성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성이 있는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협곡이었다. 협곡 너머의 가도에서는 페르베아투의 군대가 유바론의 성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페르베아투가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라크리모 가보의 도난’이었다. 왕가인 라크리모 가문의 보물을 프리틸라가 훔쳤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시데레온으로 가면서 그것을 가져갔음이 뒤늦게 밝혀졌고 이제 그것을 되찾겠다는 명목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비밀에 부쳐졌으나 적어도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아바루스 왕과 훔쳤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프리틸라가 그 두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라면 아세르가 포함될 터였고.


아바루스 라크리모는 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자신의 어머니이자 대비이면서 살리그네 가 출신인 이그노스를 시켜 프리틸라를 카푸의 왕성으로 불러들였다. 추궁하기 위해서였고 볼모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어린 라무스가 시데레온을 떠날 때 프리틸라가 곁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데?”


“저도 레이디께 그것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아, 재생과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재생과 번영의 ‘그것’이란 말이지.”


라무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라크리모 쪽에서는 여전히 그것이 도련님 손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아니. 나는 정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니까?”


“그 상처 말입니다.”


토드가 라무스의 손등을 가리켰다. 라무스는 반사적으로 손등을 들어 오래된 상흔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그냥 검이 베고 지나간 흔적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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