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둔하지 않은 넬리사였기에 더는 고집 부리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알겠어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은 하게 해줘요.”
산뜻하게 받아들이고 쾌활하게 말하면서 넬리사는 자신의 처신이 성숙하고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제법 뿌듯하기까지 했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잖아.”
그의 말에 넬리사가 피식 웃었다.
“나중에 어딘가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거든 모르는 체하지 않기. 반갑게 알은 체해주면 제일 좋고.”
“그런 우연은 없을 거야.”
“큰소리치지 말아요. 산다는 게 뜻한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알 법한 사람이.”
넬리사가 오기 어린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하긴. 앞일을 함부로 장담하는 건 어리석지.”
고개를 끄덕이고 라무스는 돌아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잘 기억해 둬요. 이건 내 예감인데 우린 꼭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등에 대고 외친 넬리사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꾸러미에서 말린 자두를 꺼내 씹으며 넬리사는 결심을 굳혔다.
“두고 보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난 여기를 떠날 거야. 나는 꼭 이 따분한 저택을 벗어나서 자유로운 여행자가 될 거라고!”
넬리사는 짐짓 큰소리쳤다. 그래 봐야 혼잣말에 불과했고,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넓은 세상에 대한 열망과 기대는 시스와 라무스라는 새로운 인물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이 뭉게뭉게 부풀고 있었다.
마침내 웅장한 창살문으로 된 정문을 지나 저택 부지를 완전히 벗어난 라무스는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았다.
구부러진 길과 먼 거리 탓에 저택과 부속 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숲과 하늘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꽤 재미있었어.’
지난 며칠을 회상하며 라무스는 보이지 않는 저택을 향해 한 손을 들었다 내렸다.
잘 닦인 마찻길을 빠르게 걷던 라무스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이따금씩 숲에서 들려오던 겨울새 소리에 다른 소리가 섞였다.
소리의 진원지는 길의 한쪽 가장자리와 인접한 계곡의 저편이었다. 거기는 이쪽보다 낮고 넓은 언덕이었다. 원래는 풀이 잔뜩 자라는 초지인데 지금은 눈 쌓인 설원이 되어 있었다.
설원을 달리는 말에 여자가 타고 있었다. 속도의 서슬에 나부끼는 옷자락이 한 송이 꽃과 같았다. 둘 사이의 거리 때문에 설원의 꽃은 자그마했고 이쪽과 비낀 방향으로 조금씩 멀어지는 중이었다.
생동하는 그 꽃은 바로 시스였다.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숲과 계곡을 돌아 청아하게 메아리쳤다. 그녀를 잠시 건너다보던 라무스는 까닭 없이 유쾌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가로젓고는 자신의 길을 재촉했다.
*
어둠이 내린 바다 같은 하늘에 유빙 같은 구름이 흘러 다니는 밤이었다. 만월에서 하루 분량이 깎여 나갔을 달은 여전히 크고 밝았지만 구름과 숨바꼭질 하느라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 부산스러웠다.
일을 배우는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지도 한참, 대장간을 지키는 이는 헝클어진 머리를 되는 대로 틀어 묶은 대장장이 혼자였다. 지저분하게 비어져 나온 머리칼이 땟국에 전 얼굴에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대장장이가 불가마 앞으로 갔다. 왜 그런지 자꾸 옛날 생각이 났다. 깨끗한 얼굴로 살던 시절, 아름다운 사람들 곁을 지키던 시절, 이름을 드러내기 자랑스러워했던 시절.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집게로 집어내며 대장장이는 헛기침을 뱉었다. 아직도 부질없는 옛 기억에 집착하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면서 망치질을 했다. 그러나 달아오른 쇠붙이에서 불티가 튀는 걸 보면서 또 옛날이 떠올랐다.
“이상한 밤이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망치를 들어 올리던 대장장이는 흠칫 동작을 멈췄다. 등 뒤에서 불청객의 기척이 느껴졌다.
“손에 든 걸 내려놓고 뒤로 한 발 물러나. 그런 다음 빈손을 내가 볼 수 있게 들어 올리고 천천히 돌아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냉랭하게 지시했다. 대장장이는 저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힘든 시기를 지나오는 동안에도 대장장이의 판단력은 흐려지지 않았고 저 목소리가 부친을 꼭 닮은 어느 아들의 것임을 단박에 알아봤다.
대장장이는 저 목소리의 사내가 자신을 망설임 없이 죽일 수도 있다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등에 닿은 검의 끝은 흔들림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허튼 몸짓을 했다가는 그 검이 왼쪽 날갯죽지 아래를 뚫고 들어와 심장을 꿸 터였다.
사내가 들이댄 것이 다른 무기가 아닌 장검이라는 사실은 대장장이를 기쁘게 했다. 대장장이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서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고 그가 검으로 자신을 상대해 주는 것은 단순한 살해가 아니라 죄인을 처형하는 의미라고 판단했다.
대장장이는 달군 쇠를 집고 있던 집게와 쇠를 두드리던 망치를 모루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느릿느릿 두 손을 들고는 뒤를 돌았다.
“손은 내려도 돼. 대장장이 투도. 아니지, 토드 쿠스토디 경. 묻겠다. 왜 그들을 배신했나?”
새카만 망토와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의 검은 이제 토드의 심장을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간절히.”
토드의 어조는 감격에 겨워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잡소리 집어 치우고 질문에 대답이나 해. 왜 배신했지?”
“맹세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라무스 플라토르 유바론 공. 시데레온의 주인이시며 살리그네의 후손이시여.”
주군에 대한 예로 무릎을 꿇으려던 토드가 멈칫하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검 끝이 두껍고 거친 옷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플라토르,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지. 그 이름을 아는 자가 살리그네 가를 배신했다는 건 특히 뼈아픈 일이고.”
라무스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 연재 요일 변경 공지입니다.
다음 주부터 화, 금 연재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스산한 시절이지만 늘 순탄하고 강건하시기를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