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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

by 화진


“내 눈도 위조품이라고 말하네요. 하지만 속여서 팔기 위해 놓아둔 건 아닐 것 같아요. 믿을 만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이 화구상의 주인이 골동품이나 고유물 쪽으로 꽤 신망이 두텁다고 하니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레이디 앙켑세라 메디우스.”


옆에 선 여성의 검은 모자에서 드리운 검은 베일을 들추고 그 안에서 빛나고 있던 녹회색 눈을 슬쩍 들여다보며 시스가 소곤거렸다. 녹회색 눈이 즐거운 듯 초승달을 그렸다.


“동의하는 바야. 레이디 시스. 이 화구상 주인, 나도 몇 번인가 거래할 일이 있었는데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봤지. 시스 말대로 저 위조품은 판매용이 아닐 거야. 아마도…….”


미소를 띠고 어깨를 으쓱인 앙켑세라가 시스의 손을 치우고 베일을 다시 내렸다.


“고객의 안목을 시험하기 위한 거겠죠.”


뒷말을 시스가 가로챘다.


“그리고 진열대를 그럴듯하게 꾸며주는 용도로도 나무랄 데가 없지. 저 석판, 꽤나 고풍스럽고 새겨진 글귀도 아주 멋지잖아.”


앙켑세라와 시스가 위조 석판의 고대 문자를 각각 눈으로 훑어 내렸다.



감미로운 키스를 하는 입술과

거짓을 말하는 입술이 하나일지니

황홀한 순간의 맹세란

아침 이슬보다 연약한 것

돌아선 연인의 등이란

성엣장보다 차가운 것

사랑은 아름답고 짧은 한바탕 봄꿈

꿈에서 깨어나니

폐허가 된 낙원과

제물이 된 친구들

사랑을 믿었던 어리석은 이, 모든 걸 잃었네



“이른바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 멋진 만큼 꽤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죠.”


중얼거리면서 시스는 다피넬의 서재에 숨겨진 청금석에서 본 ‘님파의 서’를 떠올렸다. 거기에도 사랑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어리석은 사랑의 노래와 님파의 서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암송하는 사람들은 꽤 있어도 고대 문자로 읽거나 쓸 줄 아는 사람은 드물지. 그래, 결혼 생활은 행복하신지, 레이디 시스?”


앙켑세라의 말투는 대놓고 놀림조였다. 시스가 타키툼에 온 진짜 목적이 결혼에 있지 않음을 앙켑세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진짜 목적을 주선한 사람으로서.


“놀리지 말아요. 안 그래도 이번 건을 맡은 걸 후회하는 중이니까. 안 맡았으면 그냥 잠적해 버렸을 거고, 그러면 왕명이고 뭐고 정략결혼 따위에 휘말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요정 시대의 유물이라고 알려진 청금석이 다피넬 프레케스의 손에 있을 거라는 정보를 주며 그 청금석에 새겨진 것을 모사해 오라고 한 사람이 바로 앙켑세라였다. 앙켑세라는 중개인이고 진짜 의뢰인은 따로 있긴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건이었지. 안 그래?”


“그래서 내가 별별 일을 다 겪어 가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잖아요.”


가짜 신랑에서부터 꿈속 마녀에게 애걸복걸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일이며 꽁꽁 묶여 헛간에 처박혔던 장면을 떠올리며 시스는 후 하고 장탄식을 내뱉었다.


“별별 일이라니? 무슨 별별 일인지 매우 궁금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촉박하고 장소도 마땅치 않으니 나중에 듣기로 하고. 자, 이제 그만 물건을 넘겨 줘.”


다른 손님들이 다 나가고 둘만 남았음을 확인한 앙켑세라가 손을 내밀었다. 시스가 품안에서 동그랗게 말아 묶은 양피지를 꺼냈다. 그러나 시스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앙켑세라의 손에 넘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등 뒤로 뺐다.


“먼저, 계산은 확실히.”


시스가 비어 있는 다른 한 손을 손바닥이 보이게 펴서 앙켑세라의 손 위에 얹었다. 앙켑세라는 호탕하게 웃으며 손바닥만 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시스의 손에 올렸다.


“틀림없네요.”


이번 건의 보수까지 포함하여 지금껏 시스가 벌어서 앙켑세라에게 맡겨둔 금화의 액수, 지급에 대한 보증 그리고 앙켑세라의 서명이 들어간 문서였다.


“자, 여기.”


청금석에서 본 님파의 서와 그림을 거의 똑같이 모사해 넣은 양피지를 시스가 앙켑세라에게 넘겨주었다. 앙켑세라는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는 두루말이를 슬며시 풀어 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웃거리며 보다가 다시 돌돌 말아서 끈으로 묶었다.


“누군지 살짝 알려주지 않을래요? 그거 의뢰한 사람 말이에요.”


“의뢰인에게서 비밀 보장을 요구받았고 난 약속을 했어. 그런데 웬일이야? 의뢰인에 관심 가졌던 적 없었잖아?”


“마지막으로 받은 의뢰라서 그런가 호기심이 좀 생겼어요. 워낙 비밀스럽고 신비한 내용이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은 척 시스가 둘러댔다. 청금석을 모사하러 온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그와 협력하여 함께 청금석을 살펴봤다는 사실을 굳이 앙켑세라에게 알릴 이유는 없었다.


“진짜로 발 빼겠다는 거야? 우리, 그동안 좋았잖아. 수입도 짭짤했고. 나의 유능한 동업자들 중에서도 최고로 믿음직한 인재였는데, 레이디 시스.”


앙켑세라의 얼굴에 떠오른 서운한 기색은 진심인 듯도 하고 과장인 듯도 했다. 시스는 판단하려 들지 않았다. 앙켑세라는 그런 사람이니까. 어떻다 하고 규정하기 힘든 사람.


“이제부터 편하게 빈둥거리면서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살 거예요.”


“어디서 뭘 하면서? 설마 프레케스 공작부인 노릇을 계속 하려는…… 그러니까 혹시 사랑에라도 빠진 건 아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에게 놀라서 앙켑세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스가 평범한 행복을 찾고 그 속에서 순탄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신의 안에 숨어 있었음을 불현듯이 깨달은 것이었다.


“그럴 리가요! 머지않아 텔룸으로 갈 테니 내가 받을 금화나 잘 챙겨 둬요.”


“프레케스 가에서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텔룸으로 돌아오겠다는 거야?”


“어떻게든 카푸로 가서 결혼을 무효로 만들 거예요. 그렇게 자유를 찾은 다음 내 금화를 가지고 떠나려고요. 솜다리 여관이 있는 그 언덕이 마음에 들던데 나도 거기다 여관이나 하나 세울까보다. 아니면 아예 솜다리 여관을 인수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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