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의 다피넬은 더 이상 말리티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애정을 갈구하던 작은 소녀가 아니었다. 강인한 어머니이자 공작 가의 빈틈없는 안주인이었다. 그녀는 곧장 시스에게 가서 맥박과 숨결과 눈동자를 살폈다.
“다행히 시스는 생명이 위험한 쪽은 아니야. 마르타, 넬리사와 함께 시스를 방에 데려다주고 와. 시종장은 여기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말리티아를 지키고 있어.”
말하면서 다피넬은 데세르를 쳐다보았다. 그가 말리티아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다피넬은 말리티아를 내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데세르는 말없이 일어나 말리티아를 남겨두고 시스의 옆으로 갔다.
“도망칠 생각 같은 거 없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마.”
말리티아는 뻔뻔할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다.
다피넬은 모데샤를 직접 들쳐 업었다.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눕히고는 보니타가 준 약병들이 든 상자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골라 모데샤의 입술 사이로 몇 방울을 흘려 넣은 다피넬이 속삭였다.
“고모님. 잠시 주무시고 계세요. 금방 돌아와서 돌봐 드릴게요.”
방을 나서는 다피넬의 표정은 심각했다. 보니타의 약은 모데샤의 죽음을 늦출 수는 있지만 그녀를 살릴 수는 없을 터였다. 모데샤를 공격한 건 가공할 만한 반력反力이었다. 그런 반력은 사악하고 강력한 흑주술에서 파생하는 것이었다.
식당으로 돌아간 다피넬은 시종장과 시종들을 모두 내보내고 말리티아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저렇게 치명적인 반력을 가져오는 흑주술을 쓸 주술사가 당신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시스에게 무슨 주술을 걸었기에 고모님께서 저 지경이 되신 거지?”
따져 묻는 다피넬의 입술이 참기 힘든 원망과 증오 때문에 바르르 떨렸다.
“예전의 나라면 당연히 가능했지. 그리고 나였다면 방식이 조금 더 우아하면서 힘 조절에도 실패하지 않았을 거야. 바꿔 말해서, 내가 한 짓이었다면 적어도 모데샤를 죽게 할 정도의 반력이 발생하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다.”
말리티아는 안타깝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태도조차 다피넬에게는 치 떨리게 가증스러울 뿐이었다.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꿈도 꾸지 마.”
다피넬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의 심연 아래에 단단히 묻어 두었던 어둠과 상처가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가끔씩 고통스럽게 토하곤 했던 비리고 들큼한 피 맛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다피넬은 구역질이 났다.
원래 반력은 흑주술을 행한 사람에게로 돌아오는 것인데, 흑주술사들은 자신을 대신하여 반력을 받을 인간 방패를 내세울 수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은 가까운 혈연이거나 정신적으로 주술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말리티아는 자신이 받을 반력을 다피넬에게로 돌렸다. 반력이 미칠 때마다 다피넬은 단 맛이 나는 피를 토했다. 말리티아가 쓰는 흑주술의 강도에 따라 피의 농담과 맛이 달랐다. 강도가 셀수록 토하는 피는 진해지고 달아졌다.
다피넬은 말리티아에게 도구에 불과했다. 말리티아는 쌍둥이 중에서 자신과 같은 흑주술사의 재능을 타고난 보니타만을 딸로 여겼다.
“속이는 게 아니라니까. 너도 알다시피 난 보니타에게 당한 뒤로 주술사로서의 능력이 형편없이 약해졌어. 사람을 살아 있는 인형으로 만드는 저런 흑주술을 나는 이제 쓰지 못한다는 얘기다. 다피넬. 침착하게 판단해 보렴. 반력을 받은 건 모데샤야. 내가 저지른 짓이라면 너나 데세르가 반력을 입었어야 해. 그런데 모데샤란 말이지, 모데샤.”
말을 마친 말리티아가 통쾌하게 웃었다. 넓은 식당을 나지막하게 휘도는 말리티아의 웃음소리에 다피넬은 머리털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쭈뼛 서는 듯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예감이 사느란 소름으로 돋아났다.
“설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데세르, 데세르가 한 거라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말리티아! 이번엔 또 무슨 교활한 술수를 부린 거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피넬은 말리티아의 배에서 나왔음에도 보니타와 달리 주술사로서의 자질을 전혀 타고나지 못했다. 그런데 데세르가 저토록 엄청난 흑주술사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다피넬로서는 믿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무엇보다 다피넬을 충격에 빠트린 건, 흑주술이 가능하려면 마음속 악이 선보다 압도적으로 크고 강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흑주술에 한 번 발을 담근 주술사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보통의 주술사로도, 선한 사람으로도.
다피넬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리티아를 노려보았다. 데세르의 마음을 악이 점령했다고? 아니야.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를 괴롭히려고.
“나도 무척이나 뜻밖이었단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너에게서 저토록 강력한 힘을 가진 아이가 나오다니. 게다가 첫 번째 성취가 살아 있는 인형이라니, 이 또한 놀라웠지. 솔직히 나도 데세르가 한 번에 저리 멋지게 성공할 줄은 몰랐다.”
말리티아가 알기로 흑주술사가 한 대를 건너 이어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고, 각성과 동시에 저런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한 것 또한 유례가 없는 경우였다.
“당신이, 당신이 내 아들을 망쳤어. 데세르에게 악마의 속삭임을 불어넣은 건 당신이야. 그렇지? 당신이 데세르를 꼬드겨서 괴물로 만든 거야.”
소매 안쪽에 끈을 묶어 감춘 단검을 다른 쪽 손으로 더듬으며 다피넬은 말리티아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과연 내가 저 여자를 죽일 수 있을까? 악의 화신인 동시에 나를 낳은 어머니인 저 여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과 실제로 죽이는 행위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아아 불쌍한 우리 다피. 그게 무슨 소리니? 데세르가 스스로 선택한 거야. 죽도록 욕망하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지. 그걸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이미 네 아들은 제 안의 악에 눈 떴고, 손잡았고, 기꺼이 하나가 되기로 한 거야. 알겠니?”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의 말리티아가 느릿하고 나긋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