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Mar 18. 2025

59. 살아 있는 인형


 말리티아가 휘두르는 간교한 말의 칼날이 다피넬의 마음을 베고 찢었다. 


 아아, 보니타. 저 여자는 도대체 뭘까? 양심도 모르고, 모성애도 모르고, 죄책감도 모르는 저 여자를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인두겁만 썼다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색색으로 흐드러진 화초와 독초 사이에 하얗게 죽어 있던 보니타 앞에서 다피넬은 다짐한 바 있었다. 그녀의 희생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지금이 바야흐로 다피넬이 그 다짐을 지킬 때였다. 


 보니타는 주술은 싫어했지만 약초를 다루는 건 좋아했다. 약초의 약성과 독성을 연구하여 아픈 사람들을 위한 치료약을 만들어내는 일을 보니타는 다피넬 다음으로 사랑했다. 말리티아만 아니었다면 보니타는 티토니아 대륙 최고의 약제사가 되었을 거였다. 


 포르투나 가의 온실은 아름다운 곳이자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다피넬이 가꾸는 예쁜 꽃들 사이사이에 말리티아의 불순한 목적에 쓰이는 독초들이 숨어 있었다. 말리티아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면서부터 다피넬은 온실을 멀리하게 되었다. 


 다피넬의 꽃들을 계속 돌본 건 보니타였다. 보니타의 마지막 부탁이 아니었다면 다피넬이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그 온실에 다시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보니타는 다피넬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했고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온실이었다. 


 목에서 피 냄새가 날 만큼 숨차게 뛰어가면서 다피넬은 여신 아우로라에게 기도하고 또 했다. 늦지 않기를, 보니타의 입술에 숨결이 남아 있기를, 황금빛 눈동자에 머문 생명의 빛을 볼 수 있기를, 따스한 손을 맞잡을 수 있기를……. 


 그러나 다피넬이 마주한 건 목에 덩굴을 친친 감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보니타의 모습이었다. 덩굴은 바로 옆에서 자라는 장미와 백화등의 것이었다. 청초한 얼굴과 흰 목은 장미 가시에 긁혀 상처투성이였다. 백화등의 작고 흰 꽃에도 점점이 핏자국이 붉었다. 


 말리티아가 남긴 들치근한 향이 어느 때보다 역겨워서 다피넬은 흙바닥에 주저앉아 구토를 하고 말았다. 


 보니타가 유언한 대로 다피넬은 온실을 송두리째 태워 버렸다. 보니타는 화초와 약초 그리고 독초와 함께 연기와 재가 되어 떠났다. 


 쓰라린 기억을 어루만지며 다피넬은 최후의 결심을 굳혔다. 말리티아, 당신 같은 요물을 더는 살려둘 수 없어. 내가 오늘 당신을 죽여 보니타의 복수를 하고 내 아들을 구할 거야. 


 “늘 생각했어. 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쌍둥이가 아니었다면, 보니타가 외동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보니타가 내가 아는 보니타인 한 그녀의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내 결론이야. 보니타는 당신이 해친 사람들과 새롭게 해칠 사람들을 위해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당신이 계속 악행을 저지르게 두지 않았을 거란 말이지. 하지만 당신 말대로 난 보니타의 죽음에 책임을 느껴. 미안함과 아픔을 느껴. 알겠어? 이게 바로 당신 같은 요물과 나라는 사람의 차이야. 당신에겐 없고 나에겐 있는 양심이라는 거.”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 그러니까 죽어! 죽어 버려!


 다피넬이 뒷짐 진 손에서 단검을 빼내 말리티아의 목을 겨누기까지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다피넬이 있는 힘껏 단검을 찌르는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났다. 


 *


 기분 나쁜 어둠 속에서 시스는 냉철해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이 처한 사태가 어떤 것인지 파악해야 했다. 진흙 속 같은 이 암흑은 실제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꼼짝없이 갇혀 있는 건 몸이 아니라 정신이고. 아까 목소리가 들렸었지. 기다리라는. 목소리, 목소리라…….


 그래, 페로! 나에게는 페로가 있어. 


 잠이나 꿈속이 아니어서 꿈 마녀를 부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페로라면 얘기가 달랐다. 페로는 시스의 육성 뿐 아니라 마음의 소리도 들으니까. 


 ‘페로! 페로오! 어디 있니? 도와 줘, 페로. 도와 줘!’


 시스는 목청껏 아니 마음을 다해 외쳤다. 


 “눈을 떠, 시스. 그리고 나를 봐.”


 진한 어둠을 헤치고 목소리가 들어와 시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순간 시스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방이었다. 데세르가 침대 옆에 안락의자를 놓고 앉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시스는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뿌리쳤다는 건 시스의 의지일 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시스의 손은 계속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성난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시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분노의 빛을 담은 눈동자를 굴리는 정도였다. 


 ‘주술이구나. 흑주술. 당신, 흑주술을 하는 마구스였던 거야?’


 흑주술을 하는 마가와 마구스. 사라진 옛 시대의 전설이 아니었나? 시스는 자신이 읽었던 고대의 기록을 떠올렸다. 여자 흑주술사 마가, 남자 흑주술사 마구스. 인간을 경멸하는 악의 실행자들. 


 “기분이 어때, 시스? 나를 위한 살아 있는 인형이 된 기분 말이야. 참고로 내 기분은 지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시스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속삭인 데세르가 다른 손을 시스의 뺨으로 뻗었다. 눈썹을 지나 콧날을 쓸고 내려가서 뺨을 감싸는 감촉이 생생해서 시스는 괴로웠다. 몸서리쳐지게 싫은 감각이었다. 시스는 애타게 페로를 찾았다.  


 ‘페로, 페로! 빨리 와 줘, 제발!’


 “그렇게 무표정하게 있으니 화난 사람 같잖아. 그러지 말고 좀 웃어 봐, 시스”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얼굴이 생긋 웃음 짓는 걸 느낀 시스는 자신이 아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다. 그래 봐야 현실적으로는 입술 하나 달싹이지 못했지만. 


 “그렇게 웃는 걸 보니 당신도 지금이 좋은가보군.”


 데세르가 홀린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숙였다. 그의 입술이 시스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혀가 시스의 입술 사이로 밀고 들어가려던 찰나 와장창 창문과 벽이 깨지면서 번쩍이는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