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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24. 2024

창밖은 온통 석양


 “차는 좀 전에 드셨고, 물이라도 드릴까요? 찬 거 싫으시면 냉장고에 안 넣은 것도 있으니까요.”


 “기왕이면 냉수가 좋겠다.”


 컵에 따른 차가운 물을 소혜 여사는 단숨에 반 넘어 들이켰다. 그러고는 컵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말했다. 


 “사실은 내가 너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왔단다.”


 “아쉬운 소리라고요? 할머니께서요? 저한테요?”


 라한은 순한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기까지 한다. 도저히 있을 법하지가 않다. 할머니가 자신을 상대로 아쉬운 소리를 하실 만한 일이. 


 “그래, 바로 너한테. 아쉬운 소리를.”


 그리 놀랄 줄 알았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소혜 여사가 양 눈썹을 쓱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고 진중하게 라한을 건너다본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라한은 점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심각해 보이는가 하면 비밀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는 비장해 보이기조차 했다. 


 “나는 네가 꼭 받아들여 줬으면 한다. 꼭.”


 소혜 여사의 말투가 전에 없이 부탁 조였다. 낯설고도 인간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라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할머니의 다음 말씀을 기다릴 뿐이다. 조용한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소혜 여사가 마침내 결연한 목소리를 내어 속생각을 털어놓는다. 


 “스노우베어 말이다. 거기를 네가 맡아줬으면 한다.”


 무언가 의외의 말씀을 하실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듣고 보니 너무나도 뜻밖이라 라한은 말문이 막히고 만다. 


 스노우베어의 정식 명칭은 스노우베어 GC. 수도권 근교의 골프장으로 오래 전 소혜 여사가 직접 일군 사업체다. 소혜 여사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한참 된 지금까지도 간접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을 만큼 애착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거절의 뜻이 이어지기 전에 소혜 여사가 말허리를 끊었다. 


 “아직 내 말 안 끝났다.”


 라한이 서씨네 사업이나 재산에 욕심도 관심도 없음을 모르는 소혜 여사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라한이기에 소혜 여사가 오래 마음으로만 만지작거리던 일을 맡기기에 적격이라고 판단한 거였다. 


 “지금의 스노우베어 그대로 맡으라는 게 아니야. 좀 다른 형태가 될 거다. 네가 맡을 스노우베어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압니다. 저는 아니에요.”


 나긋하고 차분하게 라한이 선을 그었다. 큰누나 은휘가 스노우베어를 탐내는 걸 알고 있었다. 설령 그 사실을 몰랐다 해도 라한에게 스노우베어는 아무런 의미도 연관도 없는 다른 세상의 이름이었다.


 “은휘가 스노우베어를 제 몫으로 여기고 있다는 거 안다. 그 아이가 실망할 걸 생각하면 안타깝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도 이것만큼은 양보를 못하겠구나.”


 “그러지 마시고 그냥 큰누나한테 맡기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주 잘 할 텐데요.”


 라한이 조심스럽게 말해 보았다. 


 “사업 수완은 있는 아이지. 하지만 앞으로의 스노우베어에 필요한 건 그런 쪽의 능력이 아니란다.”


 천천히 머리를 가로젓는 소혜 여사의 눈에 근심의 빛이 차올랐다. 


 스노우베어 GC는 꽤 오래된 시설이었다. 보수 및 유지 관리는 신경 써서 하고 있지만 코스 디자인이 구식이고 전장이 짧은 편인 건 어쩔 수 없는 단점이었다. 골프장으로서의 미래를 생각하면 바야흐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리모델링은 소혜 여사의 계획에 없었다. 


 은휘는 스노우베어를 매각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확보한 자금을 투자하여 엔터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목표였다. 


 매각이라니. 소혜 여사로서는 하늘이 무너진대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러시면 은세나 은성 누나한테 맡기시면 되죠.”


 별일 아니라는 듯 일부러 경쾌하게 말하는 라한을 향해 소혜 여사는 의미심장한 헛웃음을 지었다. 


 “은세나 은성이는 은휘를 못 이긴다. 장차 내가 죽고 없을 때 은휘가 그 애들한테 스노우베어를, 그 땅을 내놓으라고 하면 결국엔 안 내놓고는 못 배길 거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소혜 여사가 창가로 갔다. 


 “내가 아무리 신신당부를 해 놓는다 해도, 은세라면 골치 아프고 신경 쓰이는 거 질색이니 제 언니가 닦달하면 오래 버티지 못 할 테고. 은성이라면 일단은 지키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런 문제로 은휘하고 의절까지 할 수 있는 아이는 아니니 결국은 지고 말 거고.”


 창밖은 온통 석양에 물들어 있었다. 옅어진 하늘과 은은한 빛에 젖은 골짜기에 고추잠자리의 금빛 날개들이 윤슬처럼 반짝였다. 


 “해가 지는구나.”


 산그늘을 타고 밀려드는 쓸쓸함을 숨기지 않은 채 소혜 여사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인생도 저 풍경처럼 해거름에 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너무 오래 망설였다는 회한이 들었다. 


 “오래 고민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너로 결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만, 너에게 원치 않는 짐을 지우는 것이 미안해서.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고민을 너무 길게 했어.”


 “할머니. 혹시 저희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평소와 다른 소혜 여사를 보다 못한 라한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했다. 


 “아니, 아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잖니?”


 라한을 돌아보며 소혜 여사가 작게 손사레를 쳤다. 


 “스노우베어로 무얼 하실 계획이신 거예요? 가족들이 반기지 않을 줄 잘 아시면서 왜 굳이 그러시는 건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가요, 저는.”


 그 계획이 무엇이 됐든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라한의 결심도 소혜 여사 못지않게 확고했다. 


 “적어도 치매는 아니니 걱정 말아라. 죽을 때가 가까워 오니 갑자기 사람이 변했다거나 그런 것일 수는 있겠지만.”


 소혜 여사 딴에는 웃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실패였다. 굳어 있는 라한의 얼굴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으니까.  


 “빈말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시고요.”


 멋쩍게 웃으며 소혜 여사는 다시 창문 너머로 눈을 돌렸다. 


 서쪽 먼 하늘가에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있는 동안 짧은 햇덧은 끝날 터였다. 


 “어차피 한 번에 결론이 지어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시 또 의논해보자꾸나. 저기 네 어멈이 오는구나.”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하는 신호를 보낸 소혜 여사가 작업실 출입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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