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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22. 2024

뜻밖의 방문


 상아색 모자에 매인 흰 실크 리본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소혜 여사가 모자의 넓은 차양을 살짝 들어 올려 주위를 둘러본다. 


 “세상에! 요즘 세상에 아직 이런 청정한 산골 동네가 다 남아 있다니!”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소혜 여사가 며느리를 돌아보았다. 석란은 이제 막 운전석에서 내려 차 문을 닫는 참이었다. 


 “그러게요, 어머니.”


 석란이 소혜 여사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9월의 햇빛에 잠긴 산골 풍경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젤리처럼 몽글거린다. 


 한 조각 떼어내 입에 넣으면 청량하고 달콤하게 녹아내릴 것 같은, 침이 고일 듯이 싱그러운 푸름 또 푸름. 눈이 시리다. 시리지만 순하고, 순하지만 명징하다. 흙, 물, 숲, 하늘, 태양이 그려내는 천혜의 풍경화다.


 “진작에 이렇게 와 볼 마음을 낼 걸 그랬다.”


 소혜 여사가 덧붙였다. 


 “그럴 걸 그랬어요.”


 미소를 지으며 석란이 맞장구쳤다. 


 두 사람 다 이번이 첫 방문이었다. 집을 두고 굳이 이런 멀고 외진 곳에 따로 나와 살겠다는 은성과 라한을 소혜 여사가 내심 마땅찮게 여겼던 탓이다. 


 차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던 은성과 라한은 저만치 걸어가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은성이 눈빛으로 물었다. 


 슬슬 직접 확인하고 싶으실 때도 됐지, 누나의 독립생활이 어떤지. 라한도 눈으로 답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은성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설핏 웃었다. 정말 그런 단순한 이유였으면 좋겠다고.


 소혜 여사와 석란은 집 안팎을 천천히 두루 살폈다. 석란은 아기자기하고 정갈하다고 칭찬했고, 소혜 여사는 별 말이 없었다. 


 오랜만에 모인 네 식구가 차를 마시며 소소하게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도 소혜 여사는 말수가 적었다. 그래도 그녀의 낯빛만큼은 내내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로웠다.


 라한은 오늘따라 자신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빛으로 보여서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넘겼다. 복잡해 보이면서도 부드러운 눈길이었기에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얼마 동안 자리를 지키던 라한이 이만 작업실로 가 보겠다고 했을 때도 소혜 여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대 앞에 앉은 라한은 아까 다듬던 지판을 다시 잡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지판 가다듬는 작업에 푹 빠져들었다. 나무를 깎아내는 대패 소리가 사각사각 주위를 채우고 다른 모든 생각은 거기 묻혀 버렸다. 


 끈기와 정성을 담은 손길에 따라 지판은 차츰 가지런한 곡면의 모양을 갖추었다. 재료가 흑단인 지판은 신윤복의 그림 속 미인의 머릿결처럼 검고 매끈하다. 지판에서 깎여 나온 동글고 검은 대팻밥을 치우려던 라한이 잠시 문비를 떠올린다. 


 소복이 쌓인 게 꼭 오징어먹물파스타 같아. 흑단 나뭇밥을 가리키며 웃던 문비의 투명한 웃음. 근데 만져 보니 역시 나무는 나무네. 덧붙이며 찡긋하던 콧잔등. 


 계절의 경계가 모호한 늦봄과 초여름 사이 어느 날의 기억이었다. 그날의 그녀를 따라 잔잔한 웃음을 띤 채 작업대를 쓸어내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라한은 당연히 어머니가 오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할머니였다. 


 “들어가도 되겠니?”


 조금 놀라서 무르춤해 있는 라한에게 소혜 여사가 물었다. 


 “예, 그럼요. 들어오세요.”


 라한이 가볍게 대답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에게 소혜 여사 즉 피가 섞이지 않은 할머니가 아직도 어려운 존재인 건 분명했다. 그러나 어려워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묶여 살아온 세월이 생면부지의 타인이었던 세월보다 어느새 더 길어졌다. 한쪽의 성장과 한쪽의 노화 그리고 공유한 시간이 이들을 서서히 변화시켰다. 서름함은 익숙함으로 변하고 포용의 문이 열렸다. 


 이제 라한은 소혜 여사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존경심도 품고 있었고, 소혜 여사는 라한을 나름의 방식으로 신뢰했다. 비록 둘 중 누구도 그런 속내를 드러내 보인 적은 없었지만. 


 “참 좋구나, 나무 냄새.”


 작업실 안을 둘러보던 소혜 여사가 눈을 살짝 감고 코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윤택한 삶 덕분에 비교적 곱게 내려앉은 늙음일지언정 늙음은 늙음. 창으로 들어온 오후의 햇빛이 노년의 주름살들을 선명히 짚어냈다. 


 바라보던 라한은 적이 놀랐다. 할머니, 저렇게나 늙으셨던가. 


 “휴우, 나도 이제 꼼짝없는 노친네에 불과하구나. 먼길 좀 왔다고 이렇게 고단한 걸 보면.”


 라한이 권한 안락의자에 앉으며 소혜 여사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아직 곱고 정정하신데요.”


 “너도 듣기 좋은 소리를 다 할 줄 아는구나. 하지만 내가 갈 데라고는 한 군데밖에 안 남은 약한 노인이라는 건 꼼짝없는 사실이지.”


 이전의 라한이었다면 약한 노인이라는 표현은 할머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가을의 환한 빛 아래 찬찬히 마주본 할머니는 노인이 분명했고 긴 세월에 걸쳐 퇴적된 피로가 피부와 눈빛에서 얼비쳤다. 


 “네가 이리 잘 자라 주었구나. 너 나름 이런저런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도.”


 라한은 멋쩍음과 동시에 살짝 긴장이 됐다. 직감이 빗나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그저 손주들 사는 모습이나 보려고 오신 건 아닌 것 같은, 아까부터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어 보였던 그 직감. 


 무슨 말씀이기에 여기까지 몸소 오셔서 하시려는 걸까? 아무리 떠올려 봐도 라한으로서는 딱히 짚이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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