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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19. 2024

좀체 울지 않던 꼬마


 소리 없이 머금어지는 쓰디쓴 헛웃음을 삼키며 문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도 이건 기억해 주렴. 오빠하고 나는 우리 때문에 네가 구속받는 걸 털끝만큼도 바라지 않아. 우린 널 사랑하고 지지할 뿐이야. 너의 모든 선택과 결정을, 너의 자유로움을, 어떤 순간에도 있는 그대로의 너 자체를.”


 투석에 의지해 근근이 연명해 나가는 오빠를 생각하면 가슴 아프지만, 영채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또한 이 말이 영후의 오롯한 진심의 전달이기도 했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문비는 침묵했다. 


 무심하고 건조한 말투로 짧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선 문비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영채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윽고 차에 올라 차문을 닫으려다 말고 영채는 한손으로 차 문을 잡은 채로 표정이 굳었다. 후회가 들었다. 


 한 번은 안아주고 보낼 걸 그랬다고. 아이가 서먹해하더라도 한 번은 제대로 꽉 안아줄 걸 그랬다고. 


 스산한 눈빛으로 돌아서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 * *


 “자, 확인해 봐.”


 신우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선배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신우에게 문비는 엄마가 남긴 옛집의 상속과 관련된 일체의 절차와 업무를 의뢰한 바 있었다. 


 “나중에.”


 문비는 서류 봉투 대신 찻잔을 들었다. 


 “열어 봐. 수임료 청구 내역도 들어 있으니까. 수임료 꼭 제대로 받으라며? 네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얄짤없이 계산해서 청구했다.”


 “아, 맞다. 수임료. 오빠, 그걸로 고기 사 먹을 거라고 했지?”


 이제야 문비의 얼굴에 희미하나마 미소가 떠올랐다. ‘고기 사 먹는다.’는 신우의 말에 담긴 속뜻을 문비는 잘 알고 있었다. 


 신우가 일하는 이 로펌은 주말 이틀 동안 당번 변호사를 정해서 무료 법률 상담을 한다. 주 고객층은 외국인 노동자나 이주민인데 법률 지원 외에 당장의 생계 지원이나 병원 치료가 시급한 경우도 있다. 문비가 낸 수임료는 그들에게 쓰일 것이다. 


 “오늘 이렇게 온 건 오빠한테 새롭게 의뢰할 건이 있어서.”


 문비가 미리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걸 본 신우는 문비가 의뢰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집, 팔려고?”


 탁자 위 서류는 인감증명서였다. 


 “지금 살고 있는 가족이 사겠다고 한대. 오빠가 좀 처리해 줘. 위임장 써 줄게. 인감도장도 갖고 왔어.”


 “집 매매 계약 정도는 네가 직접 해도 되잖아. 뭘 굳이 대리인을 내세워?”


 신우로서는 의아한 것이 당연했다. 문비는 그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느리게 끄덕여 보인 후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실은 나, 아버지를 만났어.”


 신우는 놀란 기색이었지만 잠자코 문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집은 부모님이 이혼 전에 사시던 집이고.”


 문비는 자신의 말에 두서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쪽 부모 없이 자란 아이가 성년이 돼서 그 한쪽 부모를 만나게 되는 일이…… 마냥 해피엔딩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았고.”


 팔짱을 끼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신우를 본 문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무거움을 조금 털어낸 어조로 덧붙였다. 


 “아니아니, 그렇게 심각할 것까진 없어.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 아닌 그냥 아버지였어. 내 머릿속이 좀 복잡한 건 맞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이런저런 상황이랑 내 감정의 문제야.”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구나. 신우를 안심시키고자 다급한 해명을 하다 뜻하지 않게 명료해진 심경을 문비는 가만히 들여다본다. 신우에게 전부 다 말하지는 못했지만, 비록 두루뭉술하지만, 정직하게 말하고 있음을. 


 “정말 괜찮은 거야, 너?”


 “나 자신과 내 일 이외의 것까지 돌아볼 마음의 여력이 없는 것뿐이야. 지금은 그래. 차차 나아지겠지.”


 “하긴. 너한텐 갑작스러운 만남, 커다란 변화니까.”


 혼란스럽거나 착잡할 수도 있겠다고, 신우는 생각했다. 


 “그럼 맡아주는 거지?”


 “별 수 있겠냐. 내가 안 한다고 하면 넌 기어코 다른 대리인을 찾을 텐데.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결국 신우가 져 줄 것을 문비는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신우는 언제나 그래 줬기 때문이다. 문비가 무슨 고집을 부리면 처음에는 조목조목 안 되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지만 종내에는 슬그머니 들어주곤 했다. 


 이번만이다, 다음번엔 떼써도 소용없어, 하고 신우는 매번 못마땅한 척 위엄 있게 다짐을 두었지만 문비의 고집은 신우에게 한결같이 먹혀들었다. 


 두 눈썹과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입술을 앙다물고 씩씩거리면서도, 두 눈이 그렁그렁하면서도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던 어린 문비의 모습이 떠올라 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웃었다. 


 가령 문비가 인우처럼 울고불고 했더라면, 주먹질 발길질을 해댔더라면 신우는 끝까지 엄격하게 굴었지 결코 져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비는 좀체 울지 않는 꼬마였다. 문비는 떼를 써도 조용하게 쓰는 아이였다. 


 아이답지 않은 조용한 절박함이 신우 눈에 왜 그리도 안쓰럽던지. 


 인우는 형이 저한테는 한 번 안 된다고 한 건 끝까지 안 되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문비에게는 다르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도 형에게 따지지 않았고, 그런 인우를 보면서 신우는 일찌감치 짐작했다. 장차 인우의 가슴에 문비가 어떤 존재로 자리할 것인지. 


 “고마워, 오빠.”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웬 진지한 인사냐고 신우가 손사래를 쳤다. 


 문비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긴 인사를 대신한 다스운 웃음을. 


 오래 전 어느 날, 노란 가방을 멘 꼬맹이 문비한테 ‘오빠라고 불러. 이제부터 내가 네 오빠니까.’ 라고 말해줬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무 좋고 든든한 오빠였다고. 지나간 날들의 고마움들까지 다 눌러 담아서, 고맙다고 이렇게 꼭 한 번은 말하고 싶었다고. 


 아직 내가 내 사람들이 아는 그 온전한 가문비인 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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