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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Apr 26. 2024

계시적인 다래


 밤의 숲 냄새는 촉촉하고 싱싱하다. 9월의 숲에 밤이 들면 아직은 푸름이 우세한 나무들이 향기로운 날숨을 내뿜는다. 기름진 흙은 습기를 빨아들이고, 날벌레들이 생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른다. 상쾌한 향기와 고요한 약동의 세계다. 


 방금 차에서 내린 문비는 커다랗게 심호흡을 해 본다. 가로등의 귤색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혈색을 더한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휘감는다. 


 경사진 길을 잠깐 걷는 동안 문비는 건너편 언덕 위의 집을 바라본다. 라한의 작업실은 어둠에 잠겨 있다. 대신 본채에서 평소보다 많은 불빛이 새어나온다. 


 머리 위 하늘에 별이 총총하지만 문비는 별을 올려다볼 줄을 모른다. 그녀의 신경은 건너편 집의 불빛에 가 있다. 저 환함 안에 그가, 라한이 있을 테니까. 


 다음날 언제나처럼 일찍 일어난 문비는 도구들을 챙겨 숲으로 갔다. 요즘 들어 부쩍 조급함이 생겼다.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더 많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잠을 줄여서라도 그러고 싶은.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동안에. 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절박하게. 


 오늘의 목표물은 다래나무였다. 개울을 따라 계곡을 조금 올라가자 잡목림이 나왔다. 다래나무는 가까이에 있는 튼실한 참나무에 의지해 위로 뻗어 있었다. 


 사진을 찍고 나면 채집의 차례였다. 꽃은 지난봄에 암꽃과 수꽃 모두 작업해 두었고 오늘은 열매를 따야 한다. 문비는 소지품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채집가위를 주머니에 넣은 채 참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참나무 가지는 문비의 무게를 지탱하기에 충분할 만큼 굵었다. 다래가 올망졸망 달린 가지에 손이 닿는 위치에 발을 디딘 문비가 채집가위를 꺼내려다 동작을 멈추었다. 인기척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서 보니 개울가를 걸어 올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상아색 챙모자를 쓴 노부인이었다. 그녀가 은성의 할머니일 거라는 걸 문비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시각에 이런 산 속에 이렇게 젊은 아가씨가? 안녕하세요?”


 문비를 발견한 소혜 여사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새아침의 청정한 공기도 쐴 겸 운동 삼아 나선 산책이었다. 그 길에 이런 우연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신선한 기쁨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약간 숙이며 문비도 답인사를 했다. 


 “이른 아침부터 나무 위에서 무얼 하고 있어요?”


 방향을 문비가 있는 곳으로 잡아 계속 걸으며 소혜 여사가 물었다. 소혜 여사도 문비가 누구인지 짐작했다. 어젯밤 은성이 말한 그 친구일 터였다. 맞은편 별장에 와 지낸다는. 


 “다래를 좀 따려고요.”


 대답을 한 문비가 채집가위를 꺼내 다래 가지를 잘랐다. 


 “다래? 다래, 좋지요. 그런데 아직 안 익었을 텐데. 안 익었지요?”


 마침내 문비의 소지품이 있는 데까지 온 소혜 여사가 관심을 보였다. 


 “네, 아직 안 익었어요. 그래도 좀 따 드릴까요? 사오일 쯤 두면 후숙 되어서 먹을 만할 테니까요.”


 “아니, 괜찮아요.”


 “아, 네.”


 문비가 나무에서 내려오려는 찰나 소혜 여사가 급하게 외쳤다. 


 “아니, 따 줘요. 조금만. 아가씨 손에 든 그 정도만.”


 “네. 그럼 이것 좀 받아 주시겠어요?”


 문비가 들고 있던 다래 가지를 들어 보였다. 


 “던져요.”


 소혜 여사가 참나무 앞으로 다가왔다. 


 하나 둘 셋, 세고 나서 문비가 가볍게 던진 가지를 소혜 여사가 무사히 손 안에 받았다. 두 여자는 눈웃음을 교환했다. 


 문비가 새로 다래 가지를 잘라 나무를 내려왔을 때 소혜 여사는 손에 든 다래를 보며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가늠하고 있었다. 오래 전 그 다래와 오늘의 이 다래, 그 사이를 흘러간 세월이 얼마인지.


 소혜 여사는 삶의 비의니 신의 계시니 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작은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비의, 계시, 운명, 낭만 같은 말을 갖다 붙이는 건 죽은 남편의 성향이었다. 그 성향을 물려받은 손주가 바로 은성이었고. 


 그런데 오늘 하필 다래가 손에 들어오다니. 그 옛날처럼 다래를 따 주는 누군가를 만나다니. 소혜 여사는 문득 이 기막힌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건 계시적인 다래, 라고. 왜냐하면 다래는 소혜 여사가 그토록 아끼는 스노우베어에 얽힌 사연이었으므로. 


 오래 간직해 온 그러나 까맣게 잊고 살아왔던 기억. 시시하다면 시시한, 비밀이랄 것도 없는 비밀. 


 문비가 헛기침을 하자 소혜 여사가 상념을 떨치고 고개를 들었다. 문비는 들고 있던 다래 가지를 소혜 여사에게 내밀었다. 아까 것보다 다래가 더 많이 달린 것이었다. 


 “난 이것이면 돼요. 열매가 많은 그걸 아가씨가 가져요.”


 “아니에요. 이거 받으세요. 저는 꼭 그 가지여야 하거든요.”


 “꼭 이거여야 하다니?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제가 하는 일에 적합한 가지를 골라 채집한 거거든요.”


 “아아, 그렇다면야.”


 두 사람은 서로가 든 가지를 맞바꾸어 들었다. 


 “우리 은성이한테 들은 그 친구 같은데, 문비 씨, 맞지요?”


 “맞습니다. 은성 언니 할머니 되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제대로 인사하며 문비가 말했다. 


 “반가워요. 나는 김소혜라고 해요.”


 “이제 말씀 낮춰 해주세요.”


 “차차 낮추기로 하지요.”


 소혜 여사가 웃음을 머금었다. 적당한 예의와 적당한 편안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이 다래 가지가 문비 씨 일에 어떻게 쓰이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보면서 똑같이 그림을 그리고 표본으로도 만들 거예요.”


 “식물학 그림을 그리는군요?”


 “네, 맞아요.”


 문비가 상긋 웃었다. 소혜 여사가 사람들이 흔히들 쓰는 보태니컬 아트라는 말 대신 식물학 그림이라고 말한 것이 반가웠다. 그리고 라한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할머니가 첼시 플라워쇼의 애청자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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