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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01. 2024

애써 감추는 외로움이라면


 바이올린의 현을 지탱해주는 브리지는 단풍나무로 만든다. 브리지를 깎는 라한의 손놀림은 섬세하고 능숙하다. 본디 단풍나무 도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그의 손을 거치면 훌륭한 브리지로 탈바꿈한다.


 유려하고 튼튼하게 완성된 브리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라한의 눈과 손은 정밀하고 꼼꼼했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브리지를 내려놓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은 몸을 풀어주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면서 창문을 바라본 라한은 짙은 어둠을 발견했다. 밤이 오는 줄도 모르고 브리지 만들기에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한쪽에 놓인 전용 방석 위에 엎드려 졸고 있던 깨금이 라한의 기척에 눈을 떴다. 잠시 바라보던 깨금이 몸을 일으켜 라한에게로 왔다. 라한이 일을 끝낸 줄을 아는 것이다. 깨금은 아주 용해서 라한이 작업대에 앉아 집중하고 있을 때는 가까이 가거나 방해하는 법이 없었다. 


 기특한 깨금의 머리와 턱을 라한이 쓰다듬자 녀석은 눈을 지그시 감고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었다. 


 “깨금이 오늘 다른 날보다 더 기분이 좋지? 문비 씨가 처음으로 깨금이 쓰다듬어 준 날이라서. 그렇지?”


 그 말이 맞는다는 듯 깨금이 입을 벌리고 벙긋 웃었다. 잘 웃는 착한 개 깨금에게 라한은 북어 껍데기 간식 하나를 꺼내 주었다. 


 “이번에만 특별히 주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고. 밤에 간식 준 거 누나가 알면 나 혼나거든.”


 맛있게 간식을 먹는 깨금을 보며 라한은 아까 늦은 오후에 문비가 깨금을 쓰다듬던 장면을 회상했다. 


 그녀가 먼저 해보겠다고 나선 거였다. 라한이 깨금의 바로 옆에서 깨금을 살짝 안고 있는 동안 문비는 한 걸음 한걸음 천천히 다가섰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와서 멈춘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손을 뻗어 깨금의 머리에 얹었다. 


 “와, 느낌이 엄청 보드라워요.”


 어설프고 조심스럽게 두어 번 스치는 둥 마는 둥 쓰다듬고 물러선 문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말이었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 웃고 있었고 기뻐 보였다. 


 오늘따라 문비는 쾌활하고 대범했다. 그녀는 곧 다시 깨금에게로 가 이번에는 제대로 뒤통수와 등을 쓸어 주었다. 깨금은 얌전히 앉아 그녀의 손길을 즐겼다. 


 “따뜻해요, 깨금이 등.”


 이 말을 하던 문비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조금 가라앉았었다. 그 목소리에서 라한은 외로움의 내음을 맡았다. 아버지를 만나고 온 그녀는 이전보다 더 명랑하게 굴고 있었는데 그게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것임을 라한은 눈치챘다. 


 라한은 그녀가 친 보호막을 존중하고 기꺼이 동조해 주었다. 애써 감추는 외로움이라면 함부로 들출 일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알았다. 누군가는 감춘 것을 적당히 흘리면서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가문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게 더 편안해질 것, 더 친밀해질 것,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줄 것. 라한은 스스로에게 이런 주문들을 했다. 


 간식을 다 먹은 깨금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라한을 쳐다보았다. 


 “그걸로 끝이야. 너 지금 적정체중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하단 말이야. 과체중 되면 몸이 여기저기 아플 수도 있어서 잘 관리해야 돼. 알아듣지?”


 깨금은 못 알아들은 척 간식 상자가 있는 선반 앞에 가 앉아서 응석을 부렸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 다 안다. 이리 와 깨금아. 이제 그만 퇴근하자.”


 라한이 출입문을 열자 깨금은 고집 부리지 않고 냉큼 따라왔다. 작업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깨금이 안채 마당의 야외 테이블을 응시하며 꼬리를 흔들었다. 


 거기 앉아 있던 할머니가 오라고 손짓했다. 라한은 할머니가 자신을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음을 직감했다. 어제 꺼냈던 그 얘기를 다시 하기 위해서일 터였다. 깨금을 집 안으로 들여보낸 라한이 할머니에게로 갔다. 


 “웬 술이에요?”


 테이블 위에 싱글몰트 위스키 병과 아이스버킷 놓여 있다. 소혜 여사는 손에 들고 빙빙 돌리던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몇 년 전부터 가끔 혼자 한 잔씩 하곤 한단다. 과음하고 그러진 않으니 염려할 것 없다. 자, 너도 한 잔 하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또 하나의 잔에 소혜 여사가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랐다. 라한은 순순히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풀벌레 소리가 꽤 괜찮은 안주가 되어주는구나.”


 “할머니도 그런 말씀을 할 줄 아시네요. 은성 누나가 들었으면 좋아했을 거예요.”


 “오늘밤은 안 하던 말도 좀 해보고, 그러고 싶은 밤이라서.”


 왜요? 혹시 벌써 취하신 거예요? 라한은 이렇게 물을 만큼 경솔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에 이는 의구심까지는 어찌하지 못했나 보았다. 


 “취하지 않았단다.”


 소혜 여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침에 내가 들고 온 산다래 봤지?”


 “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 다래 때문이야. 그 다래가 그냥 다래가 아니고 계시적인 다래거든.”


 “계시적인 다래요?”


 점점 더 난해해지는 할머니의 말씀에 라한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여기서 널 기다린 게 바로 다래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다래가 왜 계시적인 다래인지는 내가 들려주는 옛날의 다래 얘기를 들으면 자연히 알게 돼.”


 “실은 저는 할머니께서 어제 하셨던 그 말씀을 또 하시려나 보다 했어요.”


 뜻 모를 미소를 머금은 소혜 여사가 술잔을 비웠다. 라한이 새로 얼음과 술을 채워 주었다. 


 “그 일에 대한 게 아니라서 안도하는 거니? 그렇다면 미안하구나. 다래가 그 일과 관련이 깊단다.”


 “저도 죄송합니다. 어떤 식으로 설득하셔도 제 마음이 안 바뀔 거라서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나로서는 할 만큼 해 봐야 하는 거 아니겠니? 내가 좋아하는 정원 일에 빗대자면 어제 언질을 준 것은 땅을 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 다래 얘기는 씨앗을 심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테고. 그러고 나서는 기다려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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