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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진 May 03. 2024

환한 햇빛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를 끌며


 소혜 여사는 느슨하게 흘러내린 숄을 끌어 올려 어깨를 덮고 팔짱을 끼었다. 


 “평생 혼자 간직하려던 이야기였다. 네가 듣고 나면 별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혼자 간직할 이야기인가 할 수도 있겠다만. 이상하게 나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였지.”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라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소혜 여사는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래, 넌 어려서부터 그리 예민하고 사려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지. 그러니. 


 “또 모르는 일이지. 너라면 나도 모르는 이유를 깨칠지도. 대단치도 않은 그 일을 내가 혼자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 말이다. 꼭 그래 달라는 말은 아니니 부담 가질 건 없고.”


 “네. 전 그냥 잘 들을게요. 그리고 여기에 잘 묻어 두겠습니다.”


 둘만의 비밀로 해드리겠다는 뜻으로 라한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고맙구나.”


 “그때 내 나이가 사십대 초반이었단다.”


 이렇게 서두를 뗀 소혜 여사가 차분하게 옛 기억을 술회해 나갔다. 


 삼십대 초반에 남편을 여읜 소혜는 그로부터 십 년 가까운 세월을 일에서 손떼고 하나뿐인 아들의 양육에만 힘썼다. 소혜가 다시 부친의 건설 회사로 돌아가 경영 수업을 받기 시작한 건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고나서였다. 


 의욕이 넘치고 사업 감각이 탁월한 소혜가 부친에게 골프장 사업을 제안했다. 행정적인 문제와 자금 조달은 정재계에 두루 인맥을 가진 부친이 해결해 주었지만 부지 선정부터 설계와 디자인 및 공사는 소혜가 하나에서 열까지 직접 챙겼다. 


 부지를 보러 갔던 소혜가 산중에서 일행과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소혜는 길을 잃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고,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고, 나침반과 지도를 가졌으며 걷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소혜는 알록달록 단풍이 든 나무 사이를 헤치고 이리저리 다니며 산세를 살폈다. 그러다 뜻밖에도 한 소년과 마주쳤다. 열두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소년도 소혜를 보았고 두 사람은 어리둥절하여 잠시 말을 잃고 바라만 보았다. 


 “길을 잃었어요?”


 먼저 말을 건넨 건 소년이었다. 


 “글쎄다. 그보다 넌 어떻게 이런 산속에 혼자 있는 거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혜가 물었다. 설마 누군가가 아이를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저는 여기 사는데요?”


 “여기 산다고?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죠. 저쪽 등성이 너머에 우리집이 있다고요.”


 소년이 가리키는 쪽을 돌아본 소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가을빛이 완연한 숲뿐이었다. 


 “거기선 당연히 안 보이죠. 등성이 너머라니까요.”


 “아,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이런 데서 무얼 하고 있니? 학교는?”


 “토요일이잖아요. 일찍 마쳤어요.”


 “여기서 학교까지 엄청 멀 텐데 걸어서 다니는 거야? 책가방은 어쩌고?”


 “빨리 걸으면 한 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 걸요. 책보자기는 형이 제 것까지 가지고 먼저 집으로 갔어요. 저는 다래를 따고 있었고요.”


 이거 보라는 듯 소년이 나무 위에서 몸을 일으켜 다래 가지를 꺾었다. 그러고는 한 개를 따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었다. 


 “맛있니?”


 “잠깐만요.”


 다래가 달린 가지를 몇 개 더 꺾은 소년이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 동작이 다람쥐처럼 산토끼처럼 민첩하고 가벼워서 소혜는 감탄했다. 


 “여기요. 드셔 보세요. 나무에서 서리 맞아 가면서 저절로 익은 거예요.”


 소년이 가지 하나를 내밀었다. 다래가 꽤 많이 달린 가지였다. 소혜는 엉겁결에 가지를 받아들고 다래 하나를 따 입에 넣었다. 


 “맛있죠?”


 소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의 까맣고 순연한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어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밤톨 같은 소년의 자그마한 치아가 연밥처럼 희고 가지런했다. 


 “얘야. 저 등성이 너머가 집이면 곧 이사를 가야 할 거야.”


 “이사요? 왜요?”


 “여기 산에 골프장을 만들 거거든.”


 “골프장이요? 뭔데요, 그게?”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일종의 운동장 같은 거야. 요만한 작은 공이랑 이렇게 긴 채를 가지고 공놀이를 하는.”


 ‘요만한’에서는 손가락으로 둥근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이렇게 긴’에서는 두 팔을 벌려 길이를 가늠하면서 소혜가 열심히 설명했다. 


 “우리집 있는 데는 빼고 저쪽에다가 만들면 되잖아요.”


 그 공놀이가 어떤 공놀이인지 골프장이 얼마나 넓은 부지를 필요로 하는지 알 리 없는 소년이 천진하게 말했다. 


 “저쪽 그리고 저쪽이랑 이쪽까지 다 포함될 거야. 이미 그렇게 결정이 났단다.”


 “이사 가기 싫은데. 전 여기가 좋단 말이에요. 다른 데 가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늘진 얼굴로 소년이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고작 이 정도였다. 


 “미안하게 됐구나. 혹시 집에 어른들 계시니? 부모님 말이야.” 


 울상을 지은 소년이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약초 캐러 가셨어요.”


 “형은 몇 살이야?”


 “쌍둥이 형인데요.”


 소혜는 명함을 꺼내 소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고 신신당부했다. 아버지한테 꼭 연락해 주시라고 전해. 꼭이야. 


 “그런데요, 이 많은 나무들은 다 어떻게 하나요? 그리고 노루는요? 오소리는요? 토끼는요? 고슴도치는요? 무당개구리는요? 도롱뇽은요? 물고기들이랑 새들은……?”


 이사가 뭔지 모르는 그 친구들은 어떡할 거냐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소년은 묻고 또 물었다. 소혜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어린 네가 아직 몰라 그렇지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래 가지를 안 움큼 안고 돌아선 소년의 축 처진 어깨 위로 비죽이 솟은 다래들이 간드랑간드랑 흔들렸다. 환한 햇빛이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를 끌며 소년은 점점 멀어졌다. 


 문득 골바람이 일더니 소혜를 지나 소년에게로 불어갔다. 다래 몇 개가 후드득 땅으로 떨어졌다. 소년은 자신이 다래를 밟는 줄도 모르고 타박타박 걸었다. 


 소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소혜는 그 자리를 지켰다. 마음이 좋지는 않았으나 다 잘 될 거라고, 충분한 보상을 할 터이니 서로서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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