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진 Apr 29. 2024

더할 나위 없는 순간


 “산길인데도 살뜰하게 정돈이 잘 돼 있네.”


 개울가를 따라 난 길을 걸어 내려오다가 소혜 여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란히 걷던 문비는 무심코 지어지는 쑥스러운 미소를 쓱 지워 버리고는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았다. 


 원래는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던 이 산길을 길다운 길로 만든 사람은 라한이었다. 제멋대로 우거져 발에 감기는 풀을 베어내고 모나게 불거져 있는 돌도 치우고. 돌이야 한 번 치우면 그만이었지만 풀은 조금만 방심해도 무성하게 자라기에 수시로 살피고 정리해야 했다. 


 라한이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건 아니 오히려 즐거움으로 여긴 건 문비 때문이었다. 그려야 할 들꽃이나 나무를 찾아 그녀가 가장 자주 지나다니는 길이 이 길이었으니까. 


 “혹시, 산다래, 드셔 본 적 있으세요?”


 “있어요. 오래 전에, 딱 한 번.”


 때는 깊은 가을이었다. 나무에서 이미 익어가던 것이라 따서 바로 먹을 수 있었다. 소혜 여사는 씻지 않은 열매를 껍질째 입에 넣는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기대에 차 바라보는 상대의 눈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먹게 되었던 산다래는 생각보다 부드럽고 달고 새콤했다. 


 당시를 떠올리던 소혜 여사는 그 맛이 자신이 정말 느꼈던 맛이 맞는지, 기억의 보정 혹은 미화는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다만 서늘하리만치 검고 맑았던 눈동자만은 선명하고 생생했다. 잊고 살다 어느 날 문득 떠올랐던 그 순간부터 내내 한결같이. 


 소혜 여사가 말이 없어졌기에 문비도 침묵했다. 신기하게도 낯선 타인과 묵묵히 함께 걷는 일이 어색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그랬다. 자박자박 박자가 잘 맞는 발소리가 개울물 소리와 어우러지고, 오래지 않아 경사진 길 끝에 있는 징검다리가 나왔다. 


 “전 이쪽으로 가요.”


 징검다리를 건너 갈림길을 만나자 비로소 문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다래, 고마워요.”


 소혜 여사가 웃는 낯으로 다래 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뭘요. 별 것도 아닌 걸요. 안녕히 가세요.”


 “나한테는 아주 별 것이에요. 내가 이 다래에 즉흥적으로 이름도 붙였다니까. 계시적인 다래라는 이름을.”


 “계시적인 다래, 라고요?”


 “황당하지요? 웃어도 괜찮아요. 그럼 이만.”


 유쾌하게 말하고 저쪽 길로 멀어지는 소혜 여사의 뒷모습을 보며 문비가 나직이 따라 말해 본다. 계시적인 다래. 처음 듣는 말인데 어쩐지 낯설지 않은 건 은성이 할 법한 말의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문비는 곧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은성 언니와 할머니, 닮았구나. 


 손에 든 가지에서 잘린 나무 특유의 풋내가 올라왔다. 나 여기 있다는, 어서 나를 그림으로 옮기라는 채근 같은 나무 냄새. 문비는 서둘러 걸었다. 


 종일 다래 가지 그리기에 몰두하던 문비는 늦은 오후에야 책상 앞을 떠났다. 중간 중간 알람을 맞춰 두고 휴식을 취했지만 눈과 손이 쉬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쉬지 못했다. 그림과 작업에 대한 구상이 뇌리에서 끊임없이 명멸했으므로. 


 문비는 바깥으로 나섰다. 지금 산책보다 좋은 처방은 없을 것이다. 하늘과 산을 보며 임도를 따라 걸었다. 순해진 햇살과 푸르스름한 나무 그늘 사이를 걷고 있자니 멈추지 않고 이대로 영원히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산을 타고 도는 임도를 걷고 걸어 꽤 높은 곳까지 온 문비는 걷기를 멈추고 길가의 돌에 걸터앉았다. 눈 아래로 골짜기의 전경이 펼쳐졌다. 집도 다리도 가로등도 밭도 마치 미니어처 같았다. 현실과 유리된 듯한 아스라함이 좋았다. 


 “문비 씨?”


 가만한 음성이 문비를 불렀다. 문비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깨금아, 오랜만.”


 라한의 옆에 앉아 있던 깨금이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그들은 더 높은 곳까지 갔다가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중이었다. 


 “깜짝 놀랐어요. 이 길에서 마주칠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어서.”


 깨금이의 리드줄을 옆의 소나무에 묶으면서 라한이 말했다. 그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잘 지냈어요? 나 없는 동안?”


 다가오는 라한을 향해 문비도 몇 걸음 나아갔다. 라한이 문비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움과 기쁨과 열정이 출렁이는 그의 눈이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잘 뵈었어요?”


 문비가 작게 끄덕였다. 자세한 얘기를 지금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인 줄을 라한은 잘 알아들었다. 그는 문비의 손을 당겨 어깨를 안고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요.”


 그가 얼굴을 내렸다. 아련하게 젖은 그의 눈빛이 가까워지고 문비는 눈을 감았다. 그와 그녀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안온한 동시에 아득한 감각이 밀려왔다.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이 친숙하고 애틋했다. 


 “여행 갈래요?”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요.”


 문비와 라한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가요.”


 “어딘데요? 같이 가고 싶은 데가?”


 “겨울 왕국이요.”


 라한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예 허황된 얘기는 아니었다. 그가 문비와 함께 가고 싶은 그곳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곳이었다. 


 “겨울 왕국? 좋아요. 그럼 우선은 내가 가자는 여행을 먼저 가고 겨울 왕국은 나중에 가는 것으로 해요. 괜찮죠?”


 “문비 씨 원하는 대로 해요.”


 “그럼 내가 가자고 한 여행은 다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죠? 일정이든 장소든 다?”


 “그래요.”


 “막상 따라와 보니 시시하다고 불평하기 없기예요.”


 “어떻게 시시할 수가 있겠어요? 내 옆에 가문비라는 여자가 있는데.”


 “오오,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에요.”


 문비는 한껏 흥을 내어 본다.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저만치에서 순하고 착한 개가 지켜주고 나뭇잎 사이로는 빛살이 환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자비하게 흐르는 시간과 무작위로 쳐들어오는 운명도 자신을 훼손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이전 12화 계시적인 다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