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함 속에 빠져 멍하니 온갖 상념에 빠져있을 때가 있었다. 나는 왜 살지, 왜 이런 허무한 감정을 느끼며 하루하루 늙어가는가 따위의 생각들이었0다. 이런저런 과자나 찾아서 주워먹고,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우는 내 모습이 돼지처럼 느껴졌다. 한번 몸에 배어버린 나쁜 습관은 좀처럼 고치기가 쉽지 않다. 가끔 내 존재가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지만, 인간은 원래 한 군데씩 부족하게 만들어진 거 아니냐는 회의적인 자기 변론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 걸음씩 되짚어 돌아가보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불평하면서도 뭐 하나 꾸준히 하지 않고, 서러워 울컥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는다. 스스로의 평범함을 인정하기가 그렇게나 어렵고 직시하기가 두려워서 자꾸만 외부로 시선을 돌리고 세상에 뾰족한 시선을 겨눴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장점과 개성이 있다고 보지만 스스로에게 그런 생각을 가져다대는 것은 어쩐지 철없는 투정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말은 성장을 저해하는 어설픈 위로처럼 느껴져서 온전히 삼키고 치유될 수가 없었다. 욕심은 가득한데 목표를 미루고 게으름을 피우며 노력하지 않는 것이 원인이었다. 작은 평정심을 찾고 성숙할 방법을 찾아봤지만 몇 겹씩 서로 유착되어있는 내적 억압의 틀로부터 도무지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가만보니 마음이라는 녀석이 사랑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떠돌고 있었다. 현재 상황으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했지만, 그건 꼭 사람만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맛있는 케이크, 멋진 관광지로의 여행, 혹은 가벼운 산책이나 좋은 책 읽기 따위에도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런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이런 저런 옷들을 구경하고 귀여운 동물들도 자주 봐보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이 공허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내가 원한 것은 허탈할 정도로 작고 소박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따뜻한 말 한 마디와 가벼운 포옹 같은 것에 목말라있었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말이 듣고 싶었지만 나에게 해준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그런 상황이 직접 목전에 닥치면 내심 부끄럽고 쑥쓰럽고 무안할 것 같았다. 특히 이상하게도 가족들과 사랑을 주고받고 표현하는 건 낯간지럽게 느껴져서 잘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말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데에 익숙해지게 됐고, 내가 듣고싶은 말을 상대방에게 해주곤 했다. 내향적이긴 해도 사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아닌데, 막상 나서면 삐걱대는 로봇처럼 고장나버리는 느낌에 점점 사람들과의 만남을 회피하다보니 자주 혼자 남겨졌다. 기계도 자꾸 쓰지 않으면 녹이 슬듯이 대화와 만남에도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관계에 관한 문제는 늘 힘들고 아프지만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고, 정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피어나지만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사랑은 허술한 듯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