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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니까 약한 것

아프고 흔들려도 괜찮다고

by 서정


초등학생 때, 나는 주말마다 저녁에 노을이 질 때까지 혼자 우두커니 집을 지켰다. 어릴 때부터 동생이 자주 아팠고, 어머니는 그런 동생을 돌보는 데에 여념이 없으셨으며, 아버지는 회사와 일에 자신을 내던져 가정에 소홀했던 전형적인 한국의 아저씨였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자'라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럽게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내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과 행동거지는 가정의 상황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나는 이따금씩 성장통 아닌 성장통을 겪으며 K-장녀로 거듭났다.


그때의 여파인지 나는 아직 내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이 서툴다. 학창시절에도 친구들의 고민상담은 곧잘 해주었지만 정작 나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위로를 받은 기억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건 강한 자존심 탓일 수도 있다. 고통과 불안과 슬픔이 자칫 가볍게 소비될까봐,(그러나 이제는 이런 것들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흘려보낼 필요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내가 이만큼 힘들다는 걸 알아달라며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서 내 속을 드러내보이는 것에 머뭇거리게 된다. 내 우울의 무게를 과시하는 것 같은 기분에 어쩐지 면이 안 선달까. 바람에 이는 낙엽에도 부끄러웠다는 윤동주 시인이 꼭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언제까지고 마냥 참기만 하지도 못한다는 점이 더 면을 서지 않게 한다. 다만 이제는 안다. 다들 말을 하지 않을 뿐, 세상엔 다양한 이유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걸. 그러자 조금은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부끄러움의 무게가 줄어들었다. 사람이니까 약한 거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강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여전히 성숙하게 나를 내어놓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많이 아팠냐며 위로를 듣고 싶은 것을 보면 내 안의 어린아이는 여전한 것 같다. 혼자서 뭐든 해내는 것에 익숙해져있는 상태와 복(!)에 겨운지도 모르고 부리는 투정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겹쳐 하루 하루를 만들어간다. 예전에는 화를 참았지만, 이제는 화를 삭이고 가라앉히는 연습을 한다. 화를 내려면 제대로 내거나, 아니면 아예 화를 느끼지도 말아야하는데 언제쯤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이 서른에 나를 찾아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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