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회
완벽하다 : 결함 없이 완전하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현관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가방을 던지고 다시 어디론가 달려간 아들을 보고 있는데 하이클래스에 올라온 알림장이 휴대폰에 떴다.
'단원평가 부모님께 확인받아오기'
아들은 학교에서 본 단원평가지를 가끔 가져온다. 그런데 초등이라도 단원평가 100점이 쉽지 않다.
어떤 문제는 실수로, 어떤 문제는 문제를 잘 못 읽어서 100점을 놓치는 아이를 보면, 완벽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낀다. 심지어 100점을 맞는다고 그 단원을 완벽하게 아는 게 아닐지도 모르는데!
아이의 단원평가지를 들고 나는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해 생각한다.
결혼에 단원평가가 있다면 우리는 몇 점일까?
나는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나에게 이 결혼생활은 나에게 결함이며 후회이다.
내가 결혼을 후회한다는 것은 완벽주의자인 나에게는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 결혼생활이 조금씩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의심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했다. 인생의 전환점을 결정한 나 자신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완벽주의라는 단어로 포장했지만, 실패가 두려운 자기 합리화였다.
아마 남편도 나처럼 결혼생활을 합리화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에게 결혼에 대한 후회는 사랑하는 내 아이에 대한 부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실제로 우리는 가끔 '우리가 결혼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주제로 대화할 때, 그럼 우리 아들이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 흘렸다. 부모의 감수성이란!
완벽한 결혼 같은 건 없다.
초등학교 단원평가에서 조차 100점을 맞는다는 게 당연하지 않음을 학부모가 되어 알게 된다. 심지어 오만가지 결정사항을 함께 해내며 살아야 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완벽함을 논한다는 건 불가능이라는 걸 느낀다.
나는 이전에 남편이 저지른 '외도'라는 죄를 언제나 그를 탓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내내 그 사람을 원망했고, 잊을만하면 곱씹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내 인생은 시궁창 그대로인 걸 인정한다.
귀책이 배우자에게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탓하기만 하는 건, 당장 내 기분조차 해소되지 않음을 나는 경험했다. 배우자를 미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헤어지지 않을 거라면 그냥 내 발등의 같은 자리만 계속해서 찍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대화로, 시간으로 또 믿음-지금의 내게는 어려운 정신적인 의지-로 해결하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상처를 무시하려 그때마다 과거의 잘못을 무기로 상대방을 힐난했다. 그도 처음에는 죄인이었겠지만 나의 계속되는 질책으로 나를 피해 다른 안식을 찾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 처음 그가 외도했을 때 이혼했어야 할까?
우리가 선택한 건 그때도 지금도 이혼이 아닌 함께 살기.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함이 먼저임을 느낀다. 내 감정을 무시한 대가는 나의 남편과 아이를 감정적으로만 대하게 된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감정에 빠지지 않고 내 감정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 해야 할 노력들을 고민하고 있다. 정말 살아내고 싶어졌다.
우리는 부부상담을 받기로 했다.
이제 우리가 놓인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안다.
나와 남편이 다시 '우리'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
내일 나에게 갑자기 봄이 찾아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봄을 위한 씨앗을 뿌려보자.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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