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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Jul 17.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터에 빠진 볼링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지난 주말, 아이를 데리고 동네 볼링장에 다녀왔다.

볼링장에 들어서며 남편이 10여 년 전 추억을 이야기한다. 남편과 나는 연애할 때 종종 볼링을 쳤다. 결혼 이후 남편과 나는 함께 볼링을 쳐본 적이 없었지만 아이와 함께 할 새로운 취미에 기분이 들뜬다.

이번에 간 볼링장에는 입구 앞에 크게 '0점은 이제 그만!'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거터에 범퍼가드가 있어 공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볼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도 점수를 좀 낼 수 있겠군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사실 나에게 운동은 참으로 어려운데 볼링도 마찬가지이다. 몇 번 쳐본 경험이 없기도 하지만 거터(gutter)로 굴러 떨어져 흘러가는 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기 일쑤이다. 거터는 볼링레인 양 쪽에 파인 홈으로, 여기에 공이 떨어지면 어떠한 핀도 쓰러뜨리지 못하고 끝까지 굴러간다. 점수판에는 - 표시로 내가 0개의 핀을 쓰러뜨렸다는 걸 알린다. 사실 점수보다는 수치스러움이 크다. 호기롭게 스텝을 밟고 공을 굴렸으나 내 마음도 모르고 애먼 가장자리로 굴러가버리는 볼은 거터로 힘없이 떨어져 아무 쓸모가 없다는 듯 굴러가버린다. 그러나 그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제발 그쪽으로 가지 말아 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치지만 결국 애처롭게 떨어지는 공을 바라보는 나 자신. 그리고 나를 그런 나를 등 뒤에서 바라보는 일행의 눈길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 보니, 볼링이란 게 내 결혼생활이나 마찬가지란 사실에 쓴웃음이 났다. '제발! 이렇게까지 될 필요는 없잖아!'라고 해도 결국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결혼생활의 거터. 나는 그곳에 떨어졌었구나 생각한다.



남편의 세 번째 외도를 알게 되었던 날,

지금 내 상태를 반영하듯 옷가지며 책이며 난장판인 거실에 앉아 이혼을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다.


아이를 키우려면 직업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환경을 위해 이사를 해야 한다.

재산을 정리하고 나누어야 한다.

여러 가지 협의할 사항들에 대한 대화를 해야 한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이를 핑계로 일을 그만두고 도망치듯 집으로 숨은 나였다. 예민한 탓에 작은 자극에도 부르르 떠는 유리멘털인 내가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무서워도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곧 두려움이 내 마음의 절반을 넘어섰다. 나는 앞으로 어떠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동시에 도망칠 곳을 찾고 싶었다. '우리 집'이라는 말이 얼마나 안정감 있는지 나는 깨닫는다. 이 테두리를 벗어나는 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하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가장 비겁한 핑계이다. 알면서도 겁쟁이인 나는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가장 잘 숨을 수 있는 곳, 어떤 잘못도 감출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비겁하다고 욕해도 좋다.

하지만 다시 우리셋을 위해 살아보자고 마음먹었을 때 나는 홀로 설 수 없다는 패배감보다는 이제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불편하지만, 이게 내 진심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나태한 진심.


볼링공은 거터처리가 되면 어떠한 볼링핀도 거치지 않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내가 이번 차례에 던진 공이 비록 어떠한 점수도 내지 않고 0점이 되었더라도, 나는 다음턴에 자세를 가다듬고 새로운 공을 던질 수 있음을 안다.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종종 거터에 빠지곤 하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주는 보호의 힘 덕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오늘 퇴근 중이던 남편이 볼링 치러 가자고 전화가 왔다.

10년 만에 함께하는 취미가 생기는 걸까 기대가 된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우리 셋이 주는 소중함이 크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거터에 빠진 0점짜리 공은 잊고 자세를 가다듬는 중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 가족을 만들어 갈 새로운 턴을 맞이할 생각에 작게나마 기대감이 든다. 부디 당신도 그렇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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