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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Jul 30. 2024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지금 내 아이의 나이만큼 어렸다.






학교를 마치고 연어 한 마리처럼 휩쓸려 교문을 나서면 지금은 추억이 된 불량식품들을 내놓고 파는 문구점이 보인다. 가판대에 놓인 하얀색 아폴로가 오늘따라 나에게 손짓하지만 나는 문구점에 들를 시간이 없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집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 큰길을 건너 아파트들이 모여있는 언덕을 한참 올라오면 언덕 꼭대기에 우리가 사는 회사 사택이 있었다.

내가 숨을 몰아쉬며 신발을 벗고 안방으로 달려갈 때까지 집 안은 조용했고, 엄마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계셨다. 엄마의 반응으로 짐작건대 나는 아마 평소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사실 내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엄마는 잠에서 깨어났을 테지만 ‘하... 벌써...’라고 생각하며 잠든 척 눈을 감고 누워 계셨을 것이다. 나는 가방도 벗지 않고 누워 있는 엄마를 끌어안았고 엄마는 초승달 눈으로 웃으며 나를 쓰다듬어주셨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엄마 이번에 시험 너무 어려웠대.”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우리 반 애들 중에 잘 본 애가 거의 없대.” 엄마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래서...” 내가 말꼬리를 내리자 엄마가 숨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 나는 올백이래!” 누워 있던 엄마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



나는 엄마의 이런 반응을 참 좋아했다. 초등학교 1학년 시험이 뭐 그리 대단했겠는가. 그래서 당시 엄마의 놀라는 반응은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행복을 느꼈기 때문에 그 순간 매우 예뻐졌다. 그래서 시험을 잘 볼 때마다 오히려 학교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길게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를 놀라게 하는 데에 성공한 나는 곧바로 올백을 맞은 친구들에게만 선생님께서 하사하신 공연 초대권을 내밀었다. 엄마는 그 봉투를 소중하게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공연이 있던 날 저녁, 엄마는 내게 단정한 원피스와 메리제인 구두를 신기고 머리를 예쁜 리본으로 묶어주셨다. 엄마 손을 잡고 단둘이 불빛으로 화려한 시민회관 계단을 올랐다. 공연에서 들었던 피아노곡들의 제목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만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만은 선명하다.


나는 엄마의 첫사랑이고 엄마도 나의 첫사랑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아이를 낳아보니 시험 같은 건 아이를 사랑하는 데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어린 나는 내가 엄마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크게 만족했다. 그게 내가 예뻐지는 방법이었다. 나는 엄마가 자랑스럽게 나를 바라본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눈빛을 되새긴다. 내가 지금 내 아이를 바라볼 때 느끼는 존재 자체로서의 사랑스러움과 눈물을 머금고 울먹일 때 참을 수 없는 귀여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여러 모습의 애정들을 통해 나를 내려다보던 엄마의 눈빛이 부모로서의 사랑임을 이해해 본다.




어느덧 나의 아이도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아이가 등교한 후 전쟁을 치른 집 안을 정리하니 벌써 아이가 올 시간이 되었다는 걸 믿지 못하는 어느 날, 불현듯 나의 1학년 기억이 나 시립교향악단 연주회를 예매했다. 이제 경로우대 금액으로 문화생활이 가능해진 엄마를 모시고 34여 년 만에 클래식 공연에 간다. 나의 가장 예쁠 때가 다시 찾아오길 바라면서. 그리고 그날 엄마도 나처럼 행복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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