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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노 Jul 23. 2024

이토록 소중한 마라탕

나만을 생각한 소중한 한 끼


오전에 일정이 있어 아이 하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J와 나는 부랴부랴 자주 가는 마라탕집으로 뛰듯 걸어갔다. 


가게 문을 열자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안도하며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양푼과 집게를 집어 든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며 뷔페처럼 차려진 진열장에서 각자 원하는 재료를 원하는 만큼 그릇에 담는다.

나는 탄수화물 중독자답게 마라탕의 옥수수면과 뉴진면(뉴진면도 옥수수로 만든 면이다), 푸주를 담았다. 옥수수알이 박힌 소시지와 새우볼도 빠질 수 없다.

재료선택이 끝난 각자의 양푼은 계산대로 보내진다. 마라탕은 매운 정도를 선택할 수 있어서 나는 1단계, J는 0.5단계를 선택했다. 계산대에서는 저울로 무게를 재어 금액을 알려주셨고, 서로 계산하겠다고 옥신각신하며 카드가 날아다니다 겨우 계산을 마친 그릇은 조리를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년 전 봄, 처음으로 마라탕에 입문한 나는 방학을 제외하고는 매주 한 번씩 마라탕을 먹고 있다. ‘방학 제외’라는 말은 이 음식은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난 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는다는 뜻이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나지만 스트레스가 쌓인 날이면 매콤한 마라탕을 먹고 싶어 지기 마련인데, 잠이 든 아이 옆에 누워 내일 마라탕 먹는 생각을 하면 상상만으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다.

 마라탕의 조리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주제는 늘 비슷한데 매일 이야기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진다. 곧 잘 끓여진 마라탕이 테이블에 놓였다. 나는 마라탕 그릇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내가 원하는 재료들이 한 그릇에 잘 끓여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처음 먹는 음식도 아닌데 마치 처음인 양 새롭게 느껴져, 한 입 먹을 때마다 재료를 음미하면서 먹게 되었다. 오늘따라 맵게 느껴진 마라탕은 평소보다 물을 더 마시고 나서야 다 먹을 수 있었다. 내가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걸 아는 J는 0.5단계가 딱 맞는다고 말한다. 나도 내 수준을 아는데 자꾸 1단계에 도전한다. 도전정신이 별로 없는 나인데 이상하게 마라탕 먹을 때만큼은 도전하게 된다.



 누군가 마라탕을 왜 좋아하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중독성 있어! 자꾸 생각나!’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음식을 함께 먹는 누군가와의 시간이 나에게 소중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마라탕을 함께 먹는 이들이 아이 친구의 엄마들로 만난 사이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음식을 먹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타인이 보기에는 사소해 보일지라도 나에겐 매우 공감할 수 있고 또 공감받을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라는 것이다.


 마라탕 한 그릇을 비우고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걸어가는 길,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모양이 한낮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구름을 볼 여유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을 다닐 때는 일하느라, 그만둔 후로는 아이를 따라다니느라 머리를 비운 채 지금을 온전히 느낄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식사에도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는, 집에서 요리할 때나 외식할 때도 가족들의 선호에 따라 메뉴를 결정하곤 했다.


그런데 마라탕을 먹을 때만은 오롯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시간을 점심 메뉴에 토핑으로 얹어 먹는 것이다.



 

비록 짧은 식사 시간이라도 그 시간을 모두 나를 위해 쓸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느낀다. 나 자신이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점차 조바심으로 가득 찬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이까지 힘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 자신을 먼저 다독이는 것이 다른 사람-남편-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셋이 낮에는 각자의 활동을 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서로에게 기대는 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이다. 그래서 만약 하루 중 많은 시간에 타인을 위한 선택을 한다거나 상대방을 의식하며 보내고 있다면, 점심 메뉴 하나쯤은 오로지 나를 위해 선택해서 먹을 수 있기를 세상의 많은 점심시간을 사는 사람들에게 바란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짧지만 소중한 내 시간을 즐거이 먹는 데에 쓰는 것만큼, 나를 위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구름을 보는 잠깐의 여유도 가져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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