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직립을 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때때로 내가 오로지 두 발로 직립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막 걸음을 뗀 어린아이들이 서툴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거나, 그러다 넘어지는 광경이라도 목격할 때면, 내가 자연스럽게 행하고 있는 직립 상태의 걷기는 그야말로 대단한 행위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왜 그런 일화도 있지 않은가. 다리가 8개인 거미가 다리가 200개인 지네를 만나 물었다. “나는 다리가 고작 8개인데도 이렇게 다루기가 힘든데, 다리가 200개인 너는 대체 그 많은 다리를 어떻게 관리하는 거니?” 그 말을 들은 지네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다리가 200개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기에 그저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 살았을 뿐이지만, 거미가 지네에게 이 사실을 자각하게 하자마자 그만 스텝이 꼬여버린 것이다. 아마도 나 역시 지네와 마찬가지로, 직립의 당연함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미처 자각하지 못했기에, 그리도 자연스럽게 걸어 다닐 수 있었던 것이리라. 직립만으로도 현기증이 이는 마당에, 이렇게 위태로운 두 다리로 심지어 뛰어다니기까지 하다니! 지적인 산책에는 반드시 두 다리가 필요하지 않지만, 물리적 산책을 위해서 두 다리와 직립 상태의 걷기는 필수적이다.
게다가 육체를 동원한 이 물리적 산책은 내게 있어 지적인 산책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산책을 나설 때마다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산책을 하는가? 왜 걷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행위가 가져다주는 어떤 면이 지적인 여정과 연관될 수 있을까?
어느 날, 유난히도 이런 생각들에 심취한 채 중고 서점에 들어섰을 때, 마침 인문학 코너에서 재미난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 물리적 산책이 지적인 산책으로 이어지게 도와준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이 책과의 만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서운한 일이 될 것이다.
걷기와 철학을 연관시켰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나의 시선을 끌었다. 이 제목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표지 역시 매력적이다. 자코메티의 조각 작품 <걷는 사람 L’homme qui marche>이 특유의 비쩍 마른 형상으로 책의 제목 아래에서 걷는다. 홀로 걷는 인간의 실존적 고독이 엄습한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 법』은 특히 철학자들의 걷기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걷기가 어떻게 그들의 사상에 기여했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시켜 준 책이기도 하다. 더불어 여기에는 인간은 왜 걸으며 산책을 하는가에 대한 해답도 들어있다.
이 책의 저자는 존 네이피어의 문장들을 인용하며 걷기에 대한 재미있는 특성을 제시한다.
“인간이 걷는 방식은 다른 어떤 활동과도 같지 않다. 걷는 동안 몸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대참사를 가까스로 모면한다. 두 발로 걷는 인간의 산책은 잠재적인 대참사의 모양을 띤다. 한쪽 다리를 앞으로 내민 다음, 박자를 맞춰서 얼른 다른 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야 얼굴이 깨질 위험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렇다. 나아가 저자는 ‘직립하는 존재들’인 인간에게 있어 ‘걷기’라는 행위가 지닌, 다른 동물들과의 차별성에 주목한다. 인간이 동물들과 달리 이성을 지녔고 언어로 소통한다는 사실은, 인간만이 걸으며 이동한다는 행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걷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 인간에게 말하고 생각하게 해 준 동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걷기 시작하면서 말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 역시 이 수순을 밟는다. 신기하게도, 아이들 또한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말을 배운다.
걷기-말하기-생각하기와의 연결고리는 인간의 걷기가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기초가 됨을 역설한다. 걷는다는 행위는 분명 한 단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새를 띤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나아가며 문장이 만들어지고 의미가 진전된다. 만일 하나하나의 단어가 그저 한 개의 발자국마냥 멈춰 있다면 문장은 만들어질 수 없고, 우리의 발걸음 역시 전진할 수 없다. 마치 멈추지 않고 걸어 나가면서 양발의 균형을 잡고, 추락이라는 대참사를 막으며 나아가듯, 단어는 계속 다른 단어와 연결되며 문장화되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문장은 걷는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디디면, 걷기는 생각과도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생각에 대한 비판과 합리적인 검토는 그것을 추락하게 하기 위한 방식일 수 있다. 한 발 나아간 생각에 대한 반박과 비판적 분석은 곧 첫 발걸음으로 시작되었던 확실한 믿음을 불안정하고 휘청이게 만드는 반대편의 발걸음이다. 기존의 생각에 대한 회의와 비판은 마치 왼발과 오른발의 균형 맞추기 작업처럼, 땅에 넘어지는 위험에 버금가는, 사고(생각)의 추락을 막아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들은 걷는다.”
생각 역시 걷기가 시종일관 구가하고 있는 “불안정한 균형”을 통해 나아간다. 우리의 사고는 끊임없이 나아간다. 따라서 철학이 언제나 '걷는 상태'에 있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류의 역사적, 정신적 진보 또한 이러한 걷기에 기인한 것이다. 철학자들이 유독 걷는 행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그에 관대한 이유도 이로써 충분히 설명된다.
“인간은 몸을 일으키고 일어나 두 발로 걷기 위해 동물의 자세를, 네 발로 걷는 삶을 떠났다. 철학적 생각 또한 몸을 일으켜 바닥을 바라보는 걸 멈추고 서서 걷는 일이다. ‘서서 생각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위쪽을 바라보고, 절대적인 것에 몰두하고, 하늘과 영원, 무한과 지평선, 진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행위인가! 앞서 우리는 한 걸음에서 다른 걸음으로 이동하는 진전 방식이 사고의 진전 방식과 연관됨을 보았다. 이러한 사고의 진전 방식은 철학의 존재 방식과도 유사하다. 누구도 의심해 마지않던 사실을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일이 곧 철학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균형을 깨지 않는다면 철학도 없다. “바로 이 점이, 추락이 시작되다가 만회되고 다시 촉발되다가 모면되는, 인간의 직립 보행이 지닌 고유한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즉, “철학은 두 발 가진 생각의 최고 본보기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오늘도 철학을 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철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걸었으며, 그들의 걷기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지,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더 멀리 걷게 해 주었는지를 소개한다. 서양인인 저자가 동양의 현자들의 걷기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특히 흥미롭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행했던 다양한 산책에 동참함으로써 나 역시 새로운 산책로를 뚫는다. 과거의 그들이 나를 한 걸음 한 걸음 더더욱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내 산책의 목적이 걷는 행위로부터 시작해 맘껏 책을 들추며 읽고 사고하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데에 기쁨이 느껴진다. 적어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걷기-사고의 진전-산책로의 개척으로 나아가게 하는 적절한 공간임은 확실하다. 육체적 산책과 지적인 산책이 결합되는 지점인 바로 이곳에서 나는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을 만났다. 덕분에 나는 내 산책의 의미와 내가 산 책들의 의미가 결국 직립 보행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특성에 기인한, 사고의 진전에 대한 욕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동안 산책에 대한 욕구와 책에 대한 탐욕 사이에서 시종일관 추락의 위험을 느끼던 나는 비로소 이 책을 통해 추락을 모면할 방편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나는 결코 안주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안주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며, 추락의 위험을 즐기며, 균형을 깬 즉시 바로잡으며, 오늘도 나는 새로운 산책로들을 개척한다.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해답을 준 책일 것이다. 전진, 진화, 진보. 이 모든 것은 걷는 행위, 즉 산책로부터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