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산책로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by 르노르망


아홉 번째 산책로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SF코너는 중고 서점으로 산책을 갈 때마다 빠짐없이 들르는 곳인데,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이 책의 뒷모습에 그만 마음을 빼앗겼다. 보통 책의 표지 뒤편에는 그 책에 대한 간략한 서평이나 요약문, 책의 주제가 되는 문구 등이 적혀있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가장 먼저 보고 판단하게 되는 것은 역시 앞모습이겠지만, 간혹 사람의 뒷모습이 마음을 끄는 경우도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다소 우중충하고 어두운 책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에 매료되어 고르게 된 의외의 책이 바로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이었다.


일단은 이 책의 뒷모습을 멋지게 그려낸, 다음과 같은 몇몇 사람들의 평가가 몹시 흥미를 끌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각축전일 뿐만 아니라 우정과 사랑, 인간 존재의 유동적 복잡성에 대한 번뜩이는 탐구] (가디언)


[스릴러이자 시간여행 SF이자 우리 시대에 대한 사려 깊은 탐구다. 해리 오거스트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굉장한 캐릭터다.](인디펜던트)


[이 놀라운 소설의 핵심은 해리가 자신의 적과 맺고 있는 뒤틀린 관계에 있다. 그 적은 또한 절친이자 동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워싱턴포스트)


SF소설로서의 수상 경력(그다지 신뢰하지는 않는다)은 차치하더라도, 그보다 이 책에 대한 직관적 호감도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고조되어, 책 속의 산책로를 완주하자 경이로운 느낌에 한참을 사로잡혀있어야만 했다. 별 기대 없이 우연히 접어든 산책로에서 기대 이상의 아름답고 숭고한 풍경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누구나 죽음 이후에 펼쳐질 시간에 대해 궁금해한다. 인간의 생이 처음과 끝이 분명한 직선으로 뻗은 선형적 시간이라면, 수명이 다하는 순간 그 직선은 어떻게든 끝을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원형적인 순환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인공 해리 오거스트가 지금까지 열다섯 번째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해리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지구에 존재한 이래 몇 안 되는 희귀한 인간, 즉 원형적 시간을 사는 존재인 ‘칼라차크라’이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인 우로보로스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시간은 반복적으로 순환된다.



우로보로스.png 그리스어로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우로보로스의 형상



그는 죽어도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길 반복한다. 그것도 태어난 시작 지점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채. 아마도 이 책에 드러난 열다섯 번째 삶 이후에도 그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반복되는 영속’이라는 데에 해리 오거스트의 비애가 있다. 이 영원한 운명의 쳇바퀴 속에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게다가 이전의 생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술사로서의 역할이 부여된 해리의 삶은 실로 신화 속 시지프의 삶을 연상시킨다.


시지프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무거운 돌을 정상까지 끌어올리고, 그 돌이 정상에서 굴러 떨어지면 다시 그 돌을 정상까지 끌어올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해리 오거스트에게 있어서 역시 삶은 매번 무거운 돌을 굴려야 하는 업보이거나 형벌일는지 모른다. 아니, 영원한 삶이 보장되어 있으니 그것은 오히려 축복일까?


해리의 인생이 특별한 것은 그가 매번 동일한 출발점에서 삶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약간의 자유의지가 발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출발점 – 그의 부모, 출생의 방식, 가족들, 성장과정, 그들 간의 관계 등 –은 대부분 그대로이다. 그는 동일하게 세팅된 채 태어난다. 선택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은 그가 점차 성장해 나가면서부터다. 전공과 직업, 거주지와 배우자,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결정권이 부여된다.


첫 생애에서의 미숙함은 몇 차례의 삶을 경험하면서 극복된다. 마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주인공 톰 크루즈가 몇 번의 동일한 죽음과 삶을 반복하면서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듯이. 이전의 삶은 이후의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전의 삶들을 통해 해리 오거스트는 자신과 같이 여러 생을 사는 기이한 존재들, ‘칼라차크라’라 불리는 그들이 원형적 시간 속에서 지구상에 존재해 왔고, 서로의 통신책을 마련해 미래를 앞당기려는 이들로부터 이 세계의 혼잡과 파멸을 막고자 노력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의 삶에 있어 최대의 환희이자 위기의 순간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과 동일한 운명을 지닌 친구이자 숙적 빈센트와의 만남이다. 빈센트는 앞선 생에서 경험한 물리학과 양자역학을 이용해 인류의 진보를 꾀하는 편이 인류의 행복 역시 앞당길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인류의 미래를 앞당기려 한다.


왠지 모를 순수하게 인간적인 호감, 혹은 그 이상의 감정으로 인해 해리는 잠시 빈센트와 공조하지만, 결국에는 이것이 잘못된 길임을 깨닫고 그만두려 한다. 빈센트는 자신과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해리가 다음 생에서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해리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기억술사인 해리의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다음 생애에서부터 해리는 자신이 기억술사임을 철저히 감춘 채 일부러 빈센트의 수하에 들어가 그의 하수인을 자처한다. 그리고 과학에 철저히 무지한 사람처럼 행동함으로써 빈센트의 환심을 사고 신뢰를 얻는다. 오로지 빈센트의 최종 목적 – 인간을 신적 경지에 이르게 만들 ‘퀀텀 미러’를 제작하는 것 –을 무산시킬 마지막 한 방을 위하여.


과학적 엄밀함과 문학적 성과를 동시에 갖추었다는 표현이 이 책에 가장 어울리는 평가일 것 같다. 게다가 철학적 심오함까지 수반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선형적 인간이 아닌 원형적 시간을 사는 인간들은 왜 존재하는가? 그건 그저 우주의 돌연변이에 지나지 않는가? 예지력이 있어 ‘미래를 보는 자’가 아닌, 이미 살았던 생을 ‘또다시 사는 자’는 전자와 무엇이 다른가? 영속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과연 행복일까? 혹은 빈센트가 추구한 야망처럼 신적인 존재가 되어 세계의 비밀을 간파할 만한 능력을 지닌다면 행복할까? 오히려 인간의 특징인 삶의 유한성이 우리를 더욱 인간답고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해리는 창녀인 소피아의 다음과 같은 말에, 한 때 빈센트와 공유했던 삶의 목적을 접는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요. 점잖은 사람들이 점잖은 인생을 살아가는 게 마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잖아요. 하지만 좀 들어보세요. 이 ‘점잖다’는 것, 그게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과학자 아저씨, 아저씨가 모든 남자들을 친절하게 만들고 모든 여자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계를 이론화하려 한대도 난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기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도 발을 멈추고 할머니가 길을 건너는 걸 도와주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노화를 치료하거나 기근을 없애거나 핵전쟁을 끝낸다 해도, 여기(하더니 손등 뼈로 내 이마를 짚었다)하고 여기(라고 말하면서 가슴에 손바닥을 꼭 대었다)를 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사람은 먼저 점잖아져야 하고, 그다음에 천재가 되어야 해요. 안 그러면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니라 기계의 노예가 될 뿐이에요.”


“ (...) 노력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선한 사람들 말이에요. 하지만 요즘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게 그런 사람들이죠. 진보를 위해 우리는 영혼을 다 잡아먹혔어요. 이젠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네요.”


결국 해리 오거스트는 신보다 필멸의 인간이 되길 자처한다.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은 인간이란 존재에게 부과된 삶 역시 단순한 반복이 아님을, 시지프가 돌을 굴리고 떨어뜨리는 반복의 형벌 이상의 것임을 알려준다. 그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 속에, 결코 반복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마치 해리 오거스트의 삶에도 자유의지의 여지가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결코 반복되지 않는 부분. 이 지점이 바로 삶을 변화시키는 변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반복되지 않는 부분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다.


시지프가 돌을 굴려 언덕 위로 올리면, 돌은 곧 그 무게로 인해 아래로 떨어진다. 시지프는 다시 떨어진 돌을 굴려 올리기 위해 언덕 아래로 내려가야만 할 것이다. 돌을 다시 굴리러 되돌아가는 동안 시지프는 무슨 생각을 할까? 돌을 굴리러 되돌아가는 그 길은 늘 같은 모습으로만 시지프를 맞이할까? 그 풍경들이 어떻게 보이는가는 전적으로 시지프의 시선에 달려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저서인 『시지프의 신화』 말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


동일한 산책로를, 특히 이 책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중고 서점을 거의 매일처럼 오가는 과정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풍경들과 마주쳤다. 매번 다른 날씨, 매번 다른 사람들, 매번 다른 기분, 매번 다른 생각들을 거쳐 서점으로 접어든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나는 늘 새로운 책을 얻었고, 새로운 지적 산책로를 마련했다.


이 길이 결국 같은 경로이지만 결코 동일한 길일 수 없었듯이, 나의 생 역시 그저 반복된 일상만으로 구성되진 않으리라. 설령 그렇다 해도, 그렇지 않게 하리라. 의미는 결국 부여하기 나름. 종국에는 우주의 먼지로 흩어져 버릴 존재라 해도, 의미조차 부여하지 않는다면 너무 쓸쓸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일상의 하루하루를 반복이라는 형벌로서만 받아들이지 않듯이, 영속적인 삶에 대한 해리 오거스트의 자세도 그럴 것이다. 그는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되찾았다. 그러므로, 해리 오거스트의 삶은 사랑받아 마땅하다. 그의 매 생은 하나같이 의미가 있었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하듯이, 나는 행복한 해리 오거스트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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