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산책로 -『천국의 열쇠』

by 르노르망


여섯 번째 산책로 - 『천국의 열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산책하다 들른 중고 서점에서, 이윤기 선생님 번역으로 출간된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눈여겨봐 두었다. 이 책은 매우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 판본은 책 등 부분이 핑크색으로 되어 있어 항상 눈에 띈다. ‘언젠가는 꼭 읽어야지’ 하고 미루어 두었지만 막상 당장은 읽히지 않는 그런 책들이 있다. 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나만은 읽지 않은 그런 책들이.


이유는 다양하다. 책의 활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은 번역이 이상해서, 왠지 선뜻 읽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책의 표지가 영 못마땅해서 등등. 보통은 이런 류의 책이 한 두 권씩은 있게 마련인데, 내게는 『천국의 열쇠』가 바로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천국의 열쇠』를 펼치고 살금살금 책 서문을 읽어나갔다. 책 디자인도 상큼했을뿐더러, 무엇보다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이 아니던가. 개인적으로 그분을 알지는 못했지만 이윤기 선생님은 훌륭한 신화학자이자 번역가, 소설가로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오래전 EBS에서 신화 강의를 하셨을 때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나는 그 당시 신화에 상당히 흥미를 가지고 있던 학생이었다. 매주 이윤기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신화 이야기와 그 상징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인간이 만들어낸 이 서사시의 머나먼 기원에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조셉 캠벨의 신화학 서적들을 탐독하게 된 것도, 지금까지도 인류의 원형적 상상력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 것도 모두 이윤기 선생님 덕택이다.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신화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때를 기억한다. 멜빵바지를 입으신 탐험가 같은 복장과 하얗게 샌 머리 때문인지, 강의를 시작할 때면 막 그리스 탐사를 마치고 머리에 앉은 신전의 하얀 석회 벽 가루를 채 털어내지도 못한 채 달려오신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곤 했다. 신화학자라는 명칭이 참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의 서문 역시 흥미진진했다. 미국에 체류하시는 동안 밤마다 클래식 무비 채널에서 해 주는 흑백 영화를 시청하셨다고 했다. 예전에 본인이 번역하셨던 소설 『천국의 열쇠』를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 때문에, 젊은 날의 그레고리 펙이 나오는 영화 『천국의 열쇠』를 열 번도 더 보셨다고 한다. 영화로 인해 이 책을 다시 읽고 개정된 번역판을 출간하신 것이다.


책의 구매를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흥미로운 서문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당장은 그 책을 외면했다. 매번 그렇듯이, 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오랜 전부터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계속 읽지 않아 왔던 이상한 고집과 동류의 감정이었을까. 오랫동안 팔리지 않았던 책이라는 데 대해 안도감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내가 너무 많은 책을 가지고 있다는 중압감 때문에(가끔 그럴 때가 있다) 무심결에 한 발짝 물러섰던 것인지, 요즈음 들어 부쩍 피로해진 눈과 약화된 시력으로 인해 책을 읽을 자신이 없어져 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산책하러 나왔다가 무엇을 들고 가기가 귀찮았던 것인지, 어쩌면 이 모든 이유들이 조금씩 다 작용했던 것인지도.


결국 머지않아 다시 들른 중고 서점에서 틀리지 않은 예감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진심으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핑크빛 책 등을 지닌 2005년의 판본은 아예 절판이 되어버렸다. 분명 그 책이 머지않아 사라지리란 걸 내심 직감했으면서도 자의로 뻔히 놓쳐버린 지금, 더 이상 무슨 변명이나 이유가 필요하랴. 결과적으로 그저 이 책이 내 것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고 자위할 밖에.


좌절감 속에서 잠시 서점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는, 도서 검색대에 같은 제목의 책 이름을 쳐보았다. 지난번까지도 그 책을 사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이토록 절실하진 않았건만, 지금은 다르다. 무슨 감정의 조화 속인지 갑자기 물밀 듯이, 『천국의 열쇠』를 읽고 싶다. 아니, 꼭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물론 동일한 책은 없었다. 오직 남아있던 중고 책은 역시 절판 상태인, 청목사에서 출간된 상, 하권으로 나뉘어 있는 옛스러운 판본뿐이었다. 이 책을 꼭 지금 읽어야 한다면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난 그 책을 집고(매우 저렴했다), 내친김에 그 옆에 있던 A.J. 크로닌의 또 다른 소설 『성채』 상, 하권도 함께 집어 들었다.



성채와 천국의 열쇠_가로22.jpeg



책의 판형은 고전적이고 낯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의 얼굴일 뿐, 그것의 본성은 아닐 것이다. 이윤기 선생님 번역의 『천국의 열쇠』를 놓치고도 그나마 더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날이 바로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골트 이야기』를 발견하는 행운을 잡은 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행운과 하나의 불운. 그러고 보면 결국 잃은 것은 없었다.


A.J. 크로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이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 속에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이상주의가 굳게 뿌리내리고 있다. 『성채』 속 주인공인 의사 앤드루 맨슨은 부패한 엘리트 의사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오직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그리고 맨슨의 곁에는 그가 타락하지 않도록 그를 지켜주는 또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있다. 이 책에는 고학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웨일스남부 탄광촌에서 개업의로 활동하며 광산촌 광부들의 직업병을 연구했던 작가 자신의 삶이 상당부분 투영되어 있다.


『천국의 열쇠』 속 치셤 신부는 어떤가. 가톨릭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장벽에 갇힌, 아집으로 가득한 종교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범인류적 세계관과 사랑의 실천은 신을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모두 포섭할 만큼 매력적인 인간애를 보여준다. 고귀한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종교인은 개방적이다. 『천국의 열쇠』라는 작품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문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나는 오랫동안 진리가 어떻게 자유를 보장하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지녀왔었다.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는 해당 종교의 규율을 따르는 것이 진리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간주되곤 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일상의 삶 속에서 금욕과 절제 등을 권장하고, 그것이 성인이나 유일신의 뜻에 부합하는 삶이라 가르친다. 대체 그런 삶 속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을 이젠 어느 정도 찾은 듯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우리가 인간임을 상기시키는 문구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 이성은 우리가 평상시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기반으로 구축된다.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이입되고, 타인의 불행에 함께 가슴 아파하며, 나아가 모든 생명체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


이러한 공감 능력은 서로를 연대하게 하고, 불의한 환경에 함께 맞서게 하며, 이 세상을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이성적 움직임에 동참하게 한다. 누군가의 선한 행동을 보며 감동하고, 그를 닮고자 한다. 내가 느낀 고통을 타인이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다. 동물처럼 먹잇감을 던져준다고 아무 데나 가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존엄에 어긋나는 일은, 그 어떤 대가를 준다 해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인해 자유롭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에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특권을 지녔기에 우리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선을 행한다. 권력이나 재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생존을 위해 비굴한 삶을 살지 않기에 자유롭다. 악행으로 인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다. 매일처럼 우리를 구속하는 세속적 가치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이야말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다. 뜨거운 가슴과 합리적 이성을 지닌 치셤 신부는 이 진리를 알기에 자유로운 종교인이다.


역시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본을 갖지 못한 게 영 아쉽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연구하던 신화학자가 가톨릭 신부의 이야기를 번역했다는 사실도 새삼 흥미롭다. 그러고 보니, 이성을 기반으로 한 인본주의가 시작된 것도 그리스인들로부터가 아니던가. 개별 없는 보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인간의 장점을 전부 모아둔 존재가 곧 신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신의 작은 조각들이 아닐까. 그러니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 어떻게 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신은 우리 안에 내재한 변치 않는 미덕을 일컫는 또 다른 용어일지도 모른다.




+ 뒤늦게나마 부가하고픈 사연


이윤기 선생님의 『천국의 열쇠』를 놓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이전에 살던 동네를 방문했다가 새로 생긴 알라딘 중고 서점에 들르게 되었다.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내렸다. 새 중고서점은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탓인지 어수선했지만, 나름대로 읽을 만한 책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영미문학 편 서가에서,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 절판된 『천국의 열쇠』를 발견한 순간, 굵은 빗줄기 속을 뚫고 내가 굳이 이 서점에 들어와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몇 년 전, 놓치고 그렇게나 후회했던 핑크 빛의 그 책 등. 바로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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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딱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예전에 읽었던 청목 출판사판 『천국의 열쇠』 속 ‘치셤’ 신부가 이윤기 선생님의 번역본에서는 ‘치점’ 신부로 번역되었다는 것이었다. 설사 영어 원어의 표기와 그 소리가 ‘치점’에 더욱 근사하다 해도, 나는 왜 ‘치셤’ 신부만이 그 책의 진정한 주인공 같이 느껴지는 걸까. 처음 읽은 책의 감동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아니면 인간을 향한 그의 열렬한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한국어로 번역된 ‘치점’이란 음색이 왠지 ‘치셤’보다 유약하게 들려서일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얻어 기쁜 마음 배후에 드리워진, 이번에도 못내 하나를 얻고 하나는 잃었다는 서운한 기분만큼은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치점’을 얻었으되, ‘치셤’은 잃은 것만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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