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꽤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심리적으로도 폭우를 얻어맞은 날이었다. 울적한 마음에 산책을 나온 나는 먼 길을 걸어 중고 서점에 들어와 이 책 저 책을 둘러보고 있었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서점 내에도 감돌았다. 아마 우울하고 갑갑한 마음에 뭐라도 읽고 날려버리고 싶어져 그날도 나는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러브크래프트 전집이다. 그건 정말이지 그날의 음침한 날씨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러브크래프트(Lovecraft). 참 특이한 이름이다. 사랑의 기술, 혹은 기교. 왠지 로맨스 소설이나 연애 소설의 전문가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소설가 러브크래프트가 개척한 장르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러고 보니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익숙한 나였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공포문학이나 환상문학의 계열에 속해 있지만, 그것들이 야기하는 공포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류의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두려운 것을 넘어서 어쩌면 인류 전체를 두렵게 할 만한 차원의 근원적인 공포, 외부로부터 야기된 공포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차원을 벗어난 곳에서 비롯된 공포이다. 공포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원인을 모르는 공포’인 것이다. 이른바 ‘코스믹 호러’라 불리는 독자적 양식을 구축한 작가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 신화’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러브 크래프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만화를 통해서였다. 이탈리아 만화가인 바타글리아의 작품 속에서 이미 러브크래프트가 쓴 이야기의 기괴함을 시각적으로 체험한 바 있었다. 이후에 읽은 타나베 고의 만화 『러브크래프트 걸작선』 시리즈 역시 러브크래프트 작품의 독특한 주제와 분위기를 비교적 잘 살리고 있었기에 나는 은연중에 이 작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렸다.
그러던 중 서점에 진열된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보고 나서야, 정작 내가 그의 원작을 읽어본 경험은 전무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러브크래프트가 쓴 작품들을 시각적 이미지가 아닌 문자로, 원작자가 재현하고자 했던 방식 그대로 직접 접해보고 싶었다. 작가로서의 그의 존재감을 제대로 느껴볼 필요가 있었다. 우중충한 날씨가 그 필요성을 더욱더 절실하게 불러일으켰다.
만화로 표현된 세계가 이미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준 이후였기에, 과연 원작 소설도 이처럼 시각적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문자적 이미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가감이 어느 정도 일지에도 관심이 갔다. 러브크래트프가 창조한 세계는 만화로 재현된 세계와 어떻게 같고 또 다를 것인가?
전집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책의 표지는 마치 그의 이름을 연상시키듯 ‘크래프트지’로 만들어진 멋스러운 모습이었다. 가격 때문에 구입했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이 전집의 가격은 멋진 표지만큼이나 유혹적이었다. 나는 일단 책이 젖지 않도록 비닐봉투로 감싼 후 얼싸안듯이 품에 안고, 우산을 쓴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장 1권을 꺼내어 읽어 내려갔다. 기존에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꽤나 음산한 산책로였음을 인정해야겠다. 그간 내가 경험했던 몇몇 공포스러운 산책로들 중에서도 단연 최상급이다. 공포의 원인은 각 이야기의 말미에서조차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공포의 원인은 때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다. 만화가 주는 시각적 충격 못지않게 문학적 묘사가 주는 행간의 공포감이 나를 압도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잠시 쉬어가야 했다. 쉼 없이 계속 걸어가기에는 너무 어둡고 두려운 길이다.
결국 나는 전집의 1권을 채 다 읽지 못한 상태로 침실 머리맡 책장 사이에 꽂아두었다. 단편이나 중편들을 모아 둔 책이었으므로 자기 전 한 편씩 읽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곧 포기해 버렸다. 연신 뒤숭숭한 꿈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꽤 오랜 기간 러브크래프트 1권의 자리는 그냥 거기인 채로 머물렀다.
그러던 중 책장 정리를 빌미로 나는 1권을 본래 러브크래프트 전집 케이스에 꽂아두었다. 이곳이 책의 원래 자리니까, 책은 자기 집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 1권의 귀환 작업을 마친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예기치 않은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전 주문했던 가습기에서 물이 새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가습기는 어느 중소기업에서 만든 제품인데, 상품평도 좋고 믿음이 가 주문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물이 새는 바람에 다른 상품으로의 교환을 요청했고, 그 요청에 따라 새 상품인지, 아니면 이전 상품을 수리해 보낸 것인지 불분명한 제품을 다시 받았다. 한두 번 틀었을 때는 물이 새지 않아 이제 그런 일이 없겠거니 쉽사리 마음을 놓았고, 과감히도(지금 생각하니 어리석게도) 그 가습기를 책이 쌓여있는 거실에 두었다.
그런데 그만 가습기가 난조를 부린 것이다. 때 아니게 가습기로 인한 물난리 사태가 벌어졌고, 무게 때문에 주로 바닥에 놓아둔 전집류들 중, 하필 러브크래프트 전집에 물이 스며들어, 그중 1권의 뒷 표지가 말짱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책의 케이스가 코팅된 두터운 마분지로 되어있어 나머지 책들이 물에 젖는 걸 막아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1권은 구해낼 수 없었다. 가엾은 1권. 만약 며칠 전 내가 그토록 설레발을 치며 그 책을 본래 케이스에 집어넣지만 않았더라도 오늘 그렇게 모든 권들을 대표해 젖어버릴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책의 겉장을 휴지로 꾹꾹 누르고, 각각의 페이지마다 휴지를 끼워 넣어 책 소생술을 펼치는 와중에도 후회를 거듭했다. 물이 닿은 책의 표지가 울고 있었다. 말 그대로 ‘책이 울었다.’
이리하여 비 오는 날 우연히 우리 집에 오게 된 러브크래프트 전집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물난리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이상이 나와 러브크래프트 전집이 맺게 된 기이한 인연에 대한 보고서다.
러브크래프트 전집이 특히 물과 인연이 많았던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을까? 집에 함께 머물 뻔했던 가습기가, 누구에게도 해를 끼쳤다는 상품평이 없었던 가습기가 유독 우리 집에서 이유 없는 고장을 계속 일으킨 것도 우연일까? 혹시 러브크래프트 전집이, 책에 습기를 가하는 가습기라는 존재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다 읽지도 않고 케이스로 복귀시킨 데 대한 슬픔으로 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은 그렇게 울었던 것인가? 러브크래프트 전집의 정령이 존재하는가? 내가 미처 예측할 수 없는 ‘코스믹 호러’가, 어쩌면 ‘나’, ‘러브크래프크 전집’, 그리고 ‘물’ 사이에 작용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결국 가습기는 반품해 버렸다. 그 사물이 잠시나마 우리 집에 있었던 흔적이라고는 오직 ‘울었던’ 자국이 남은 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