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산책』은 진정 산책다운 책이다. 『산책』을 내 글의 목록에 넣기로 결정한 후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책을 나는 두 버전으로 갖고 있다. 한 권은 늘 산책을 가던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한국어판이고, 다른 한 권은 프랑스어판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파리의 한 헌책방에서였다.
실리 멜로디 Silly Melody라 부르던 그곳은 유학 시절 그야말로 나의 산책로에서 빠지지 않았던 헌책방이었다. 책뿐만이 아니라 오래된 음반들도 함께 취급했는데, 너무도 많은 것들이 쌓여 있어서 정말 필요한 것을 고르기 위해서는 시간을 꽤 써야 했다. 주인장이었던 필립 아저씨는 항상 털모자를 쓰시고(여름에조차) 특유의 날렵한 몸짓으로 책을 정돈하고 계셨지만, 그 많은 물건들을 혼자 정리하시기에는 늘 역부족이었다. 정리가 된 부분이 있고, 정리가 전혀 안 된 부분이 있어서 만약 정리가 안 된 부분에서 내가 원하는 책을 고르고자 한다면 거의 탐험가 수준의 역량이 필요했다. 허나 잘만 고른다면, 운 좋게도 제법 가치 있는 책들을 얻을 수 있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을 정말 사랑했다. 근처에 대형 서점들도 있었지만, 근처의 서점들을 돌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실리 멜로디를 거치는 것으로 나의 서점 산책은 끝이 났다. 그곳은 일반 대형 서점보다 늦게까지 영업을 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달리 갈 데가 없는 파리에서 일주일 내내 늦게까지 문을 여는 서점은 내게 반가운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파리 시내의 서점들을 돌며,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서점 몇 군데를 알아두었다가, 근처로 갈 일이 있으면 저녁 시간을 그런 서점들에서 보내곤 했다. 생 미셸 거리에서는 특히나 실리 멜로디를 즐겨 찾았다.
그곳을 유독 좋아했던 이유는 주인장 필립 아저씨의 익살스러운 눈빛과, 관용 어린 태도 때문이었다. 책을 보는 안목도 탁월했는데, 그런 점에서 천상 책 상인이었다. 종종 내가 고른 책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면서 “참 좋은 책을 골랐구나”라고 칭찬을 해 주실 때면, 그 책을 쓴 게 아니라 단지 ‘고른’ 것임에도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절판되어서 구하기 어려운 옛날 책들이나 잡지 등의 가격 또한 아저씨의 품성만큼이나 관용적이었다. 나는 때로는 한 권, 때로는 꽤 많은 책을 구매하기도 했는데, 아저씨께서 계산을 하기 직전, 늘 “학생할인!!!”을 큰 소리로 외쳤다.
아저씨의 한결같던 반응이 아직도 기억난다. 항상 속삭이듯 “잠깐만, 잠깐만!” 하면서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깊고 짙은 속눈썹을 깜박이며 약간 주저한다. 항상 내가 원하는 가격(주머니 사정이 정확한 표현이다)을 미리 제시하며 책을 내려놓으면 약간 겁이 난 표정으로 웃는다. 결국에는 내가 원하던 대로 상황이 종결되는 편이지만, 아저씨의 고집에 내가 물러설 때도 있다. “이 책은 귀한 거라 이제 구할 수가 없어. 인터넷상으로 주문하면 훨씬 비싼 걸 알게 될 거다.”라고 말씀하시거나, “거기까지는 안 되겠다.”라고 포기하듯 말씀하실 때는 수긍해야 한다. 책 상인으로서의 아저씨의 안목과 평가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실리 멜로디를 지나가다가 아저씨께서 가게의 앞부분에 공들여 진열해 두신 책들을 보게 되었다. 이런! 세계 최초의 만화가 로돌프 퇴퍼의 만화들이 아닌가! 스위스인이었던 로돌프 퇴퍼는 1833년 최초로 만화 매체를 선보인 미학자였다. 내가 들어서서 이 책의 가격을 묻자마자 아저씨는 “이 책은 몹시 귀한 거란다. 1943년 출간된 판본으로 한정판이라 책의 순번도 적혀있지.”하며 책의 뒷면에 적힌 숫자를 보여 주셨다. 총 1125권 중 이 판본은 986번째 것이다. 마치 판화 작품처럼 한정판에 번호를 매긴 책이었다.
“초판본도 아닌걸요!” 아저씨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고 만다. “얘야, 그 책의 초판본은 지금 구할 수 없어.” 아저씨의 이 말 뒤편에서 들리지도 않은 소리를 들은 건 왜일까.(그러니 깎을 생각은 마렴)
그 자리에서 주머니를 뒤져 내가 가진 돈 전부를 동전까지 털어보았다. 그러나 퇴퍼의 역사적인 책 네 권을 갖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한 돈이다. “차비까지 털었어요. 집에 걸어가야 할 지경이에요.” 볼멘소리를 하는 나를 보던 아저씨의 길고 짙은 속눈썹이 깜박인다. “그래, 그럼 있는 만큼만 내렴. 대신 내가 전철 표를 한 장 주마.” 그렇게 로돌프 퇴퍼의 귀한 책들은 내게로 올 수 있었다.
프랑스를 떠나며 마지막으로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애석하게도 늘 계시던 아저씨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대신 처음 보는 여자분이 그 가게를 지키고 계셨는데, 그분과 아저씨의 관계를 아직까지도 나는 모른다. 어떤 사정으로 그간 단 한 번도 비우지 않았던 가게를 비우셨는지도 나는 모른다. 결국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채 돌아왔고, 몇 년 후 다시 파리를 방문하게 되었다. 실리 멜로디의 자리에는 낯선 상점이 들어서 있었다. 그때의 상실감은 차마 표현할 길이 없다. 마냥 그곳이 거기에 있어 줄 줄로만 알았다. 실리 멜로디로의 마지막 산책은 그렇게 마감되고 말았다.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은 프랑스에서 『걷는 남자 L’homme qui marche』라는 제목으로 1995년에 출간되었다.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출간된 것은 2015년이다. 프랑스에서 개최하는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이 프랑스에서 많은 인기를 얻어서인지, 나 역시 이 책을 한국에서보다 실리 멜로디에서 처음 만났던 것이다. 한국어판의 판형이 프랑스어판에 비해 작은 것이 약간 아쉽다.
산책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다니구치 지로가 구성한 큼직한 칸 덕분이기도 한데, 작은 판형으로는 아무래도 여유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글과 그림이 결합된 만화는 근래에는 ‘그래픽 노블’, 즉 ‘그림 소설’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문학 작품을 능가하는 다양한 소재들과 세련된 그래픽이 어우러져,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만화에 대한 편견을 일소시키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로돌프 퇴퍼가 만화를 창시한 이래로 이 매체는 현대의 기술력과 결합해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거치며 점차 진화해 왔다.
다니구치 지로의 그래픽 노블 『산책』은 매우 고요한 만화이다. 대사는 별로 없지만, 주인공의 걸음걸이와 행동, 표정과 움직임만으로 그가 걸으며 느끼는 것들이 온전히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나는 분명 만화를 보고 있는데, 산책을 하고 있다. 문자적인 세계가 선사해 줄 수 없는 또 다른 기쁨이 거기에 있다.
만화는 칸의 크기나 형태, 시선의 각도, 말풍선 등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표현한다. 『산책』은 주인공이 산책을 하며 접하는 풍경들에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천천히 움직인다. 만화 『슬램 덩크』에서처럼 시간을 빠르게 분할한 칸들을 활용하기보다는, 칸의 배치를 큼직하게 구성함으로써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를 둔다.
오랜만에 찾는 책이었지만 책장에서 곧바로 프랑스어판을 찾아냈다. 실리 멜로디에 들어온 책들에는 항상 가격이 적힌 작은 흰색 스티커가 붙어있다. 5유로. 책장을 넘겨보다가 빛바랜 감열지 영수증을 발견했다. 점점 색이 희미해져 겨우 판독이 가능하다. 영수증에는 내가 지불한 금액이 4.5유로라 적혀있다. 그 와중에 10퍼센트 할인을 해 주신 모양이다. 절로 웃음이 난다. 그러다가 왈칵 눈물이 솟는다. 그리움이 벅차올랐다. 영수증 윗줄에 쓰여 있던, 사라져 가는 실리 멜로디의 주소 때문이다.
예전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그곳. 감열지 영수증마냥 존재가 희미해져 버린 그곳. “내 이름은 필립이야. 그러니깐 여기는 필립 멜로디란다.”하시던 주인장의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실리 멜로디를 만난 것도 순전히 산책 덕분이었다. 이후에는 책을 사러 일부러 그곳으로 산책을 나갔지만 말이다. 조 퀴넌의 말은 옳다. 전자책이나 온라인 서점을 이용할 때에는 감히 느낄 수 없을 애잔한 추억들이 밀려들었다. 책에 꽂혀있던 빛바랜 영수증이 잊혀져 가던 추억을 선명히 해준다. 실리 멜로디와 필립 아저씨, 로돌프 퇴퍼와 다니구치 지로, 파리의 생 미셸 거리와 지하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기억 속에서만큼은 그대로다.
다니구치 지로는 말한다.
“시시한 일상의 사소한 일로 보이는 것도 자세하고 깊이 관찰하다 보면, 거기서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포착해서 한 편의 만화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배움의 결과가 바로 『산책』입니다.”
아마 <산책하다 산 책>이라는 글을 쓰고 있는 의도 역시 다니구치 지로의 그것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산책을 통해 만난 책들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