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긴 네 번째 산책로

by 르노르망


제법 긴 네 번째 산책로

-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대체 이토록 기이한 책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느냐고? 나는 이 책을 늘 가던 중고 서점의 에세이 코너에서 발견했다. 왠지 좋은 에세이를 한 편 읽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 잠시 그곳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일단 내 관심을 끈 건 그 장황한 제목이다.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이라. 그것은 곧 나를 위한 책이란 이야기가 아닌가. 대체 그동안 누가 나를 위한 책을 써 주었던가.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책의 크기와 표지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화자로 추측되는 불만스러운 표정의 한 남성이 양 옆으로 쌓여있는 책의 탑을 바라본다. 그는 책들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바로 앞에 놓인 커피 잔이 쓰러져 커피를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대체 이 책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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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책을 고르기에 앞서 몇 페이지 정도는 반드시 읽어보고 구매하는 편이지만, 조 퀴넌의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은 몇 장을 읽어나가는 동안에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무심코 들고 읽어 내려간 이 책은 그야말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할 만큼 재미있었다. 시각적 이미지나 동작 등으로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오로지 글로만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가 감히 책을 소재로 독자를 웃기려 하다니!!!


책을 소재로 한 유머의 구사에는 몇 가지 치명적 어려움이 있다. 첫째, 작가가 언급하고 있는 책을 독자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을 경우, 이 유머는 전혀 유머러스하지 않다. 둘째, 작가가 언급하고 있는 책의 수량이 많고 장르가 혼합된 경우 역시 그가 구사하는 유머는 잘 먹히지 않는다. 셋째, 작가가 자신이 언급한 책들의 내용이나 주인공들을 가지고 은유나 패러디의 미학을 마음껏 뽐낼 때면, 설사 여기에 등장한 책들을 전부 읽은 독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않는 한 작가의 유머를 따라잡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런 책을 완벽히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는 독자층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으리라 예상된다.


이 책의 제한된 독자층에 속한다고 하기도, 그렇다고 아예 배제되기에도 좀 애매한 입장인 내게 있어, 그의 재담 어린 문장은 나로 하여금 마치 그가 언급했던 모든 책들을 나 역시 전부 읽었지만, 그저 시간이 흘러 책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탓에 작가의 모든 유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할 뿐이라는 착각을 줄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작가 조 퀴넌은 자신이 언급하는 책들을 전부 읽지 못한 독자들을 소외시킨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으면서(정말이지 대단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하고 있었다. 결코 모든 이가 웃을 수는 없는 종류의 소재로 꽤 많은 이들을 웃게 하는 퀴넌의 필력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게다가 그가 다른 작가들이나 비평가들에게 퍼붓는 너무도 과감한 비난에는 내 간담이 다 서늘해질 정도다. ‘그러고도 문단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책을 출간할 수 있는가’ 걱정이 될 지경이다. 그의 거침없는 입담과 냉소적인 풍자를 읽노라면 유머의 진정한 의미를 만끽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독자와 맺을 수 있는 모종의 담합이자, 인간 정신이 선사해 줄 수 있는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랴. 반복되는 웃음과 감탄에 뒤이어 나는 자문했다. 이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찌 이리도 재미있게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발견한 당일 바로 구매하지 않았던 이유는, 매달 진행되는 세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그저 이 책이 모든 이들을 웃기기에는 다소 무리일 수 있겠다는 막연한 예감과, 작가의 독특한 독서 편력으로 인해 다른 책들에 비해 구매 경쟁력이 떨어지리라는 나름의 진단, 그리고 어디까지나 마지막이 세일을 통한 이득이었다. 물론 할인 행사를 하는 당일에 나는 중고 서점으로 산책을 나갔고, 과연 예상대로 여전히 서가의 같은 위치에 꽂혀있던 이 책을 뽑아 들고 유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감한 결정은 분명 이 책을 전부 읽기 전이었기에 가능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불현듯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공포로 잠시 전율했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만큼이나, 한 사람과 책의 만남은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와의 만남이다. 각 행성들의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가 다르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시기가 다 다르듯이, 인간과 책과의 만남 또한 마찬가지다. 조 퀴넌의 풍부하면서도 독단적인 독서 편력에 휘둘리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의 궤도를 이탈한 채, 퀴넌의 은하계 속에서 하나의 위성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조 퀴넌은 어린 시절부터 책에 파묻혀 살았고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 야구 경기를 보러 가서까지도- 책에 탐닉하는 독서광이다. 또한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킨들이나 e-book으로 책을 보는 것을 싫어하며 끝끝내 종이책을 고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책과의 우연한 만남을 조성해 주는 공간을 중요시한다. ‘킨들로는 어림없지’ 장에서 조 퀴넌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전자책 단말기를 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필요없다. 누크로 책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여자친구의 손글씨를 불현 듯 발견할 수 있을까. 킨들에서 빛 바랜 에펠탑 입장권이 툭 떨어진 일이 있을까. 나는 기술 문명의 반대자요, 그래서 자랑스럽다.”


“너무 속되다. 온라인 도서 주문, 하루 만에 배송 완료. 그래서는 모든 것이 싹 망가져 버릴 것이다. 내 삶에서 마법적이고 비과학적인 면이 싹 사라질 텐데, 나한테는 그런 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서로운 우연의 왕국, 내가 진정으로 편안하게 느끼는 그 유일한 곳에서 내 삶은 떨어져 나와 버리겠지.”


유일하게 이 책에서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부분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대한 의견이다. 그는 이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어떻게 그토록 아름답고 고귀한 작품을 이토록 독서광인 작가가 완독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도 몇 번의 시도를 거듭했으면서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이들의 독서 취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할 수는 없는 노릇.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에 있어서도) 결국 내게 윌리엄 트레버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알려준 이는 그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나는 그 점을 평생에 걸쳐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들을 읽고 그토록 감동했던 사람이라면, 설사 『레 미제라블』을 잠시 미루어 두었다 한들 뭐가 그리 대수랴.


그래서 결국, 나는 앞서 내가 자문했던 질문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찾았다. 조 퀴넌이 이토록 재미난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 그 동력은 책이라는 사물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이다. 다만 그 책은, 손으로 만지고 넘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책은 비록 많은 공간을 차지하여 성가신 존재라 하더라도 소장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책은 옛날의 책이든 지금의 책이든 어디까지나 '책 자체'여야만 한다.


“책에는 연금술적인 힘이 있다. (...) 책의 구체적인 물성이 우리를 정의한다. 우리는 책이라는 사물 자체에 마법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 전자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이해가 안가거나 바보 같다고 할지 모른다. 그들은 책이 자리만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귀여운 자식들도, 프라하도, 시스티나 성당도 자리를 차지한다. 최근에 어느 유명한 과학 저술가가 책의 물성은 중요하지 않으며 종이 책에 집착하는 것은 페티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봤다. 그는 종이책이 “장례식장의 관 같다”고 했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의 미래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훈족, 반달족, 나치, 무어족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책인데 유명 과학 저술가들 쯤이야.”


더 나아가 조 퀴넌이 어떻게 이러한 독서 편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기술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당신의 책들은 여전히 의미가 있었다. 당신이 술에 발목을 잡히기 전에, 젊고 희망에 부풀었던 시절에, 그 책들이 의미 있었던 것처럼, 아버지의 책들은 여전히 전에 했던 어떤 일보다 훨씬 더 나은 일을 하리라는 희망을, 예전에는 알았던 그 어떤 휴식처보다 훨씬 더 좋은 휴식처를 가지리라는 희망을 말했다. 책들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꿈에 매달릴 수 있었다.


책이 아버지를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실패의 아픔은 달래주었다. 독서는 인류가 피할 수 없는 것을 지연시키는 방법이다. 독서는 우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다. 이 장대하고 가능할 성싶지 않은 독서 계획이 우리 앞에 줄지어 있는 한, 우리는 숨을 거둘 수 없다. 나는 아직 <빌레트>를 다 읽지 못했으니 죽음의 천사에게 나중에 다시 오라 전하라. 거기에는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나 믿노니, 이것이 책이 인류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모든 생은, 최고의 생조차도, 끝은 슬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책은 끝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드러낸다. (...)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책들이 있는 한, 아직은 배를 돌려 안전한 항구를 찾을 기회가 있다. 포크너의 말마 따라, 그저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아직도, 우리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간 내가 소장해 온, 그리고 앞으로 소장하게 될 책들로 인해 종국에는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걱정에 시달렸던 하세월. 그러다가 만난 조 퀴넌의 이 책은, 그간 내가 해 온 책 덕질이 그다지 죄책감을 가질만한 일은 아니며, 또한 책을 사다 두고 읽지 않는 것 역시 그렇게 심한 병적 증상은 아니란 것을, 그리고 같은 책의 여러 판본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주제넘은 사치가 아니며, 내가 산 책을 도무지 버리지 못하는 이 성격 또한 나만이 지닌 중증 정서 장애 때문만은 아니란 점을 알려주었다. 그는 마치 책처럼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독서에 대한 열정을 공유할 이가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 단 한 사람인 줄만 알았던 그 지구인이 자신과 같은 또 다른 지구인을 만났을 때의 안도감을 일깨워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은 그 어떤 책 보다 내 독서의 지평을 확장시켰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책을 대해 온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이 책은 그간 내가 읽었던 다른 책들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선을 던져 주었다. 하마터면 이 책을 놓칠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더구나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작가들에 대한 생각에, 나는 이 책을 만질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이다. 조 퀴넌의 필력과 번역가의 훌륭한 번역에도 불구하고. 다만 한 가지, 그가 중고 서적을 사지 않는 이유가 나의 폐부를 찌른다. “중고 서적을 사면 작가에게 돌아가는 몫이 없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저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그러나 중고 서적으로나마 그의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독서 목록과 정신의 산책로는 훨씬 빈약해져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조 퀴넌에 대한 깊은 감사로 감히 속죄를 대신한다. 진정 되살리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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