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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Sep 15. 2023

벽돌책을 대하는 자세

독서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벽돌책이란 무엇인가. 대략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두께가 두꺼운 책을 말한다. 유사시에 호신용 무기로 사용가능하며, 상대방의 머리를 가격할 시 벽돌과 유사한 정도의 충격을 줄 수 있는 책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번외로 지적인 모습 어필하기, 베개, 라면 받침, 방탄조끼 대용으로 활용 가능하다.(효과는 보장할 수 없으며 모든 책임은 사용자에게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성경이 총알 막아주던데?) 이 정도면 굳이 읽지 않더라도 그 가격을 지불할만한 것 같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책들 중에는 코스모스, 총균쇠, 사피엔스 정도가 벽돌책이라는 이미지에 부합한다. 벽돌책도 벽돌책 나름이다. 책의 내용이 방대하고 두껍다고 해서 그걸 읽는 게 꼭 어렵지만은 않다. 문제는 시간이니까. 두께와 상관없이 어려운 책은 따로 있다. 개인의 독서 경험이나, 지식, 전문성, 독해력, 교육 수준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나의 경우, 애초에 대중 대상으로 쓰인 위와 같은 책들은 재밌다는 생각으로 읽는다. 재밌다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재밌다는 말은 내 표현력의 한계 때문에 쓰는 말이지 술자리, 연애, 영화, 게임, 스포츠 직관처럼 재밌다는 의미는 아니다.


 분명히 나는 한글을, 문장을 읽고 있다. 그건 인식이 되는 상황이다. 그래 이건 내 머리가 완전히 생각을 멈춘 건 아니라는 증거다. 한 장 두 장 넘기면서도 내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게 뭔 소리? 처음에는 옮긴이를 탓한다. 번역이 잘못된 거 아니야? 내가 원어로 읽어도 이렇게 어려울까. 원어로... 아 나는 독일어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 감사합니다. 번역가 선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는 중에 한 생각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있다. 도대체 이 양반은 문제가 뭐였을까. 나는 철학 전공자도, 이 책을 한 번에 이해할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다. 이런 책이 나는 어렵다. 난해한 책. 남들도 그러리라 믿는다. 나만 이해 못 하는 거라면 너무 슬픈 일이다.


 결국 다 읽고 나면, 사실 엄청 괴로운 독서 경험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뭔 말인지 모르면서도 책장을 넘기다 보니 책이 결국은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쇼펜하우어를 읽었다고 말할 자격을 얻었다!


 이건 독서 방법에 대한 나의 생각인데, 일단 끝까지 읽는 게 중요하다. 멈추고 생각해 봤자 어차피 이해가 안 된다. 이해도 안 되고 내용도 기억 안 나는 책 완독해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미리 변명하자면, 쉬워서 100퍼센트 이해했다고 생각한 책도 며칠에서 몇 달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내용이 다 날아간다.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몇 년, 수십 년, 수백 년…(어이, 거기까지) 어려운 책이나 쉬운 책이나 내용과 문장을 외우려고 책을 읽는 게 아니다. 학자서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게 직업인 것도 아니다. 애초에 나는 어떤 효용성을 따지고 책을 읽지를 않는다.

 한번 끝까지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중간에 포기한 일은 다시 시작해서 끝을 내기 어렵지만, 엉망진창이더라도 한번 끝을 본일은 다시 시작하기도, 다시 끝을 내기도 한결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 말을 했다고 해서 꼭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다시 읽겠다는 건 아닙니다)


 원문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여기저기서 자주 인용되는 그의 철학에 대한 흥미가 있었고, 그즈음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하곤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친구와 얘기할 때는 심지어 '나는 허무주의자다' 라는 식으로 지껄이기도 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들의 홍수에 휩쓸리던 나는 책뒤에 덧붙여진 옮긴이 글. 쇼펜하우어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철학 해석을 읽으며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삶의 행적 생활방식, 태도, 풀어서 설명 철학은 무척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다. 해제,라고 되어 있는 그 글의 제목은 이렇다. '프랑크 프루트의 괴팍한 현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고독한 삶과 작품' 괴팍한 현자라는 말은 참 기가막힌 수식어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비관주의 같은 수식어 때문에 그의 사상에 관심 갖는 건 뭔가 우울하고 부정적인 사람이라는 오해를 부른다. 이런 표현하는데 도덕적 지탄을 받을까 봐 꺼려지지만. 사회생활, 인간관계에서 우울한 경향이 있는 사람을 꺼리는 게 사실이다. 이런 인식과 다르게 알고 보니 쇼펜하우어는 우울하고 음침한 인간이기 보다는 진지하면서도 재치있는 사람이였다. 다시 한번 그의 철학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1818년 8월, 쇼펜하우어가 쓴 서문으로 돌아 왔다.


 역설적이라 비난받고 진부한 것이라 무시당하는 앞뒤의 장구한 두 기간 사이에서 진리가 누리는 축제의 기간이란 너무나 짧을 뿐이다. 또한 이 진리를 주창한 장본인도 마찬가지로 역설적인 운명을 맞곤 한다. 하지만 인생은 짧지만, 진리는 멀리까지 영향을 미치며 오래 살아남는다. 그러니 우리 진리를 논하기로 하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역, 을유문화사.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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