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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04. 2023

11-1. K 차장_엘리트가 노력까지 한다

나는 지금 하는 것도 아니에요

드라마에서 보면 굴러 들어온 낙하산이 기존 직원을 괴롭히기도 하고, 실력 좋은 신입 직원이 회의에서 발표한 아이디어로 회사에 큰 파장을 불러오는 등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다. 그래도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사람들, 소위 엘리트는 존재하니, 오늘의 주인공, 우리 회사 성골 출신 K 차장이다. 

K 차장은 학벌도, 생김새도 그리고 그의 이력도 화려한 편이다. 회사 특성인지는 모르나 대부분 수수하고 모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반면, 그녀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지금까지 근무한 곳들도 선택받아야 갈 수 있는 주요 부서였고, 좌천되기는커녕 원하는 곳에서 근무를 하는, 연줄이라는 능력도 갖춘 능력 있는 상사 중의 상사였다. 

대부분이 남자인 상사를 상대하다 보니, 나는 여자 상사에 대한 환상이 있고, 또 이상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고는 한다. 흠 잡히지 않고 업무적으로 능력 있고 인정받는 멋진 여자 차장을 선망하게 된 것인데, 내가 그렇게 되어야지 보다는 저런 사람을 보고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듯하다. 그런 나에게 K 차장은 업무로도, 외적으로도 자기 관리에 투철한 멋지고 당당한 커리어 우먼처럼 보였다. 

 

업무로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보고서를 잘 썼다. 보고서를 총괄하는 차장이 있음에도, I 팀장은 K 차장에게 보고서를 담당하게 했다. 그녀는 군말하지 않고 팀장의 지시에 따랐고, 같은 한글 프로그램을 씀에도 저렇게 깔끔할 수 있나 싶게 그녀의 보고서는 논리적이면서 단정했다. K 차장이 공문을 작성하고 결재를 받으면, 나는 그 공문을 종종 찾아보았는데, 분명 전임자가 작성했던 공문이 있음에도 차별성이 느껴졌다. 가끔은 그 공문을 프린트를 해서 업무 수첩에 끼워두었는데, 내가 공문을 작성할 때 틈틈이 쓸만한 어휘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아직도 궁금하다. 많이 써서 보고서를 잘 쓸 수도 있지만, 도대체 보고서를 잘 쓰는 비결이 뭘까. 

K 차장은 보고서 자체도 잘 썼지만, 기획력이 탁월했는데 그녀의 (안)은 처장까지 일사천리로 통과되었고, 결과마저도 우수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지사의 업무실적을 대표하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각종 보고와 결재 건들로 아주 바빴고, 잦은 외근으로 간간이 야근도 하며 열정을 불태우는 듯했다. 중대한 사안을 맡을 만큼 그녀는 특출 났고, 대외적으로 그녀를 대표로 드러낼 만큼 생김새도 호감형이었다. 누가 보아도 수려했고, 언변도 뛰어났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업무가 아님에도, I 팀장은 그녀를 수족으로 부릴뿐더러 과하게 챙기기도 했다.

 

K 차장은, 나의 상상외로 회식자리에서는 더 발군이었다. 묵묵하게 회식에 임하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그건 나의 잘못된 예상이었다. 그녀는 참 상사에게 유들유들했는데, 나뿐만이 아니고 다른 직원들도 과하다 느낄 정도였다. 마시자! 하는 분위기가 아님에도 호응을 유도했고, 시키지 않아도 I 팀장 옆에서 그의 손과 발이 되어 회식을 주도했다. 팀장 옆자리를 자처하다니! 이런 훌륭한 상사가 있을까! 


그녀에게는 회식자리마저도 자의적인 업무의 연장선이고 본인을 어필할 기회였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는데, 웬만한 차장들은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녀는 주로 상사들에게 신경을 쓰고 집중했고, 그녀 밑의 직원들은 사실 그녀에겐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처장 앞에서, 팀장 앞에서 땡땡 직원이 일을 이렇게 잘한다~며 호응을 유도했고, 그 대화의 마무리는 본인이 직원들을 신경 쓰는 자상한 차장이다로 끝이 났다. 술을 많이 마시는 회식자리가 아님에도, 맛있는 고기를 먹는 회식임에도 소재거리로 이용당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K 차장은 종종 기회를 노려 꼭 나나 다른 여자 직원을 걸고넘어졌다. 처음 한 두 번은 장단을 맞추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별 반응 없이 지나갔다. 털털하게 직원을 대하려 하지만, 그녀의 성격상 털털하게 대하려 하는 의도가 눈에 보였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좀 거리감이 생겼다. 확실히 직원들에게 인기 있는 상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지 않는가. 직원들에게 평판이 좋아서 그녀에게 득이 될 건 사실 별로 없고, 굳이 잘 보일 이유도 없다.

사무실에서도 오히려 팀장의 비서에 가까웠는데, 센스 넘치는 그녀의 성격상 팀장의 의도를 잘 읽고 눈치껏 행동했다. 그러니 팀장의 이쁨을 받는 건 당연했지만, 총애가 지극하면, 부작용도 생기는 법. 그녀에게는 적들도 참 많았다. 시샘일 수도 있지만.

뒤에서 그녀의 흉을 은근슬쩍 보는 차장이 하나 있었는데, 정작 그녀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언변에 홀랑 넘어가기 일쑤였고, 여우니 어쩌니 해도 팀장을 밀착 마크하고 있으니 덕분에 차장들은 더 자유로웠다. 

 

그런데 나는, 시건방지게도 그녀가 좀 안타까웠다. 실력을 갖춘 그녀가 왜 팀장에게, 아니 이 회사에 최선을 다할까. 가끔을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되려 쩔쩔매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한창 민원업무를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는 터라 기를 쓰고 일하는 그녀를 보면 아쉬웠고, 그녀의 시간이 아까웠다. 그럴 시간에 가족에게 집중하세요. 하고 조언하고 싶어졌다.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건지. 

그런 나의 비틀린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회식 후 같은 방향이라 걸어가는 나에게 그녀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땡땡씨, 큰 부서에서는 지금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나는 지금은 하는 것도 아니에요. 땡땡씨도 앞으로를 생각하고, 승진 시험도 틈틈이 준비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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