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겠다고, 지켜보겠다고
그렇구나.
나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크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먼저, 그녀는 누가보아도 출세지향형 사람이라는 거다. 미래를 생각하며 팀장으로의 승진, 그리고 더 큰 앞날을 사전에 준비하는 사람이고 그녀가 보았을 때 나는 승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공부해야 하는 타이밍인 것이다. 잘 보이기 위해, 상황에 쩔쩔매는 게 아니고, 야망이 있기에 한 땀 한 땀 공을 들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의 내재된 능력은 내가 파악한 이상이라는 것. 그녀의 이력에서 보여주듯, 주요 부서에서 그녀는 지금보다 더 많은 업무실적과 회식 매너를 보여주었을 텐데, 내가 작은 빙산의 조각만 보고서도 K 차장은 대단하다 여겼으니 그녀 능력의 십분지 일이라도 내가 엿본 걸까 싶다. 몇십 년을 회사에서 살아남고, 인정받아 온 그녀인데. 그녀가 정말 모든 힘을 다해, 죽을힘을 다해 애쓴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안타깝기는 무슨. 뱁새가 황새 걱정하는 격이다. 나만의 짧은 다리에 빗대어 그녀를 재단한 셈이니,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양, 나는 아직도 갈 길이 참, 많이 멀었다.
팀장의 편애를 받는 만큼, 회사 내에서는 그녀를 시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고상한 적을 상대하는 건 그녀의 취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소리 없이 잘 넘어갔다. 그녀를 거슬려하던 다른 부서 차장도, 막상 업무에, 성과에, 윗 상사에 도움이 필요하면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옆에서 지켜보니, 일단 일은 잘하고 봐야 당당할 수 있고, K 차장의 정치력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 있긴 있었는데, 대부분 직원들이 유추할 수 있었다. 민원이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달칵달칵하며 질질 구두 끄는 소리가 들려오면, 그녀가 기분이 나쁘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담당 직원에게 면박을 준다거나 전화 통화로 큰소리를 내기 일쑤였다. 사무실에 구두를 잘 신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 일하는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 있는데 그녀는 어디에서나 구두로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하는 티를 참 많이 내는 사람이었는데, 업무를 잘하니까 그러려니 하기도 했고, I 팀장이 그 행동을 묵인해 준 결과이기도 했다. 가끔씩은 사무실에서 그녀의 신경질적인 구두 소리를 감내하는 수준이 되었고 누군가는 그 소리를 비꼬기도 했지만, 사람은 완벽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라도 티를 내주니, 오히려 조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녀의 기획력에 조그만 오점이 생기기도 했는데, 주요 부서에서만 근무하다 보니 민원업무를 포함한 실무자의 애로사항을 피부로 체감하지 못한다는 거다. 직원시절 대부분을 기획과 인사부서에 근무했고, 실무부서에 배치된 적은 없다 보니 보고서로 일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보고서 상에는 가능한 것들이, 사람들이 얽힌 실제 상황에 대입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같이 일하는 대리나 과장은 K 차장의 현실과 거리가 먼 업무지시에 불편함을 보이기도 했고, 불만을 넌지시 비추기도 했으나, I 팀장의 교통정리로 묵살되었다. 어찌 되었건, 성과위주로 회사는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가끔은, 실제 민원과 상대할 때 K 차장이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무례한 사람들과의 협의에서 그녀는 맥을 못 추었는데, 비교적 엘리트들 그러니까 대화가 되는 사람들과의 논쟁 경험이 대다수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말이 통해야 토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다짜고짜 찾아와 고성부터 지르는 민원인을 상대하기엔 그녀는 너무 고고했다. 실무도 이럴 때 보면 경험할 만하다.
내가 부서 내 업무를 옮기며 고군분투할 때, 누구보다도 나의 다른 마음가짐을 눈치채고 응원해 준 건 K 차장이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에서 “전투태세”로 돌아선 나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었고, 직원들 앞에서 땡땡씨는 총괄 업무가 맞나 봐! 하며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업무상 은근슬쩍 옷차림에 신경 쓰고 온 날이면 부러 알아채고 조금 큰 소리로 이야기해 주었는데, 섬세한 그녀의 어시스트가 아닌가 싶다.
그녀는 나에게 여자 상사로서의 유리천장보다는 드넓은 기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기꺼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몸소 실천해 보였고, 그 노력을 폄하하려는 주변의 사소한 질시는 어디나 있다는 것, 집중해야 할 것은 본인의 목표라는 걸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여자 상사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기준으로 판별하려 했고, 도끼 어린 눈은 아니지만 흠을 찾으려 애썼던 것 같다. 반면, 남자 상사는 그러려니 하고 방관했고. 사실 성별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사람인 것을. 상사 나름인 것을.
그녀는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비교적 짧게 근무하고 승진을 위한 디딤돌이 될 주요 부서로 이동하였는데, 나는 그녀의 실행력에 심심한 응원을 멀리서나마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발령과 함께 그 헤어짐에도 그녀는 그녀 다운 말로 나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 승진 시험을 꼭 준비하라며, 땡땡 씨를 기억하겠다고,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참으로 상사 다운 말이지 않은가. 기를 북돋아 주면서도, 기억을 해서 어쩌겠다는 걸까. 끌어준다는 건가. 막연한 기대감을 주면서, 여지를 남기면서도 또 확언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다른 누군가에게 같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살짝의 인정을 받은 묘한 기쁨에 고양되어 아직도 마음 한 켠은 훈훈하다. 이러나저러나 잘난 사람에게 받는 인정은 나를 설레게 한다.
시간이 한참 흘렀고, 나는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역시나 승진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그녀를 힘들게 했으리라 추측하지만, 그녀는 결국 한 발자국 더 올라갔다.
그녀는 행복할까. 아마 행복할 것 같다.
승진을 했으니, 소소한 일상을 즐길까? 잠시나마 즐기다가 그다음 목표를 준비하고, 뛰어갈 것 같다.
그녀는 그럼 상사니까. 내가 그녀와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길 멀리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