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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07. 2023

12-2. L 차장_다시 만나고 싶다

공감을 받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회식자리의 L 차장 역할이었다. 그녀는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오디오가 비지 않게 지원사격을 하는 수다쟁이였다. 그러니까 처장과 신입사원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재미도 없고, 할 이야기도 딱히 없는 상사들 과의 술자리에서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흥미 있는 내용도 있었고, 흘려 지나가는 소식들도 있었는데, 일단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다. 상석은 지루해 보여서는 안 된다. 다른 테이블의 박장대소에 처장의 시선이 간다면, 흐름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L 차장의 선발로, 신입사원의 부담을 덜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차장들도 한시름 편한 회식을 했다. 딱히 의도가 있는, 잘 보이려는 태도가 아니라서 그녀의 수다는 더욱 빛났다. 정말 말이하고 싶어서, 스스로 나서서 이야기를 하는 거다. 


여러 상사를 접하다 보니, 노골적으로 상사에게 잘 보이려 몸을 바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꼭 뒷말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는 환하게 웃었으면서 뒤에서 누군가는 수군거렸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리고, 적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히 승진 시즌에는 차장들끼리의 눈치싸움도 치열했다. 

그런데, L 차장은 참, 적이 없었다. 승진 대상에 아직은 멀어서 일 수도 있고, 스펙으로 인해 알아서 수그리는 차장들도 더러 있었으며,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겉으로 드러내서 말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도 한몫했다. 워낙 유들유들하기도 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호감을 사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낮췄다. 또, 겉으로 봤을 때는 영락없는 “아로미” 였으니까. 

 

한창 I 팀장에게 불려 가 그의 1:1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I 팀장이 한두 번 일을 시키고 나를 지켜보더니, 말이 새나가지 않자, 어느 순간 그의 업무 외적 심부름을 내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나만의 불문율인 셈인데, 상사가 지시하는 사항을 가능한 말하고 다니지 않는 거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의 문제라고도 여겨져서, 입사 후 지금까지도 지키려 노력한다. 행사 준비로 여력이 없었지만, 그가 어떤 지시를 내리면 몸이 저절로 반응해서 순응하고 처리했다. 

한 번은 그가 급하게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과일 바구니를 구해오라고 했다. 별생각 없이 떠맡았는데, 일이 겹쳐 순간적으로 갈 곳을 잃었다. 법인카드를 사용하면 안 되었고, 마감기한은 정해져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근처 마트에 가 보았지만 취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L 차장에게 연락이 왔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내가 사무실로 복귀하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나 보다. 나는, 가능한 혼자 해결하려 했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팀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1분 1초가 아쉬워 L 차장에게 냉큼 털어놔 버렸다. L 차장은 본인의 사비로 마트에서 과일을 샀고, 꽃집에서 바구니를 구매하여 둘이 포장을 하고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I 팀장을 마주하고 과일 바구니를 건넸는데, 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서늘한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닐 듯싶다. L 차장이 알게 된 걸 달갑지 않아 한 듯하니, 내 혼자 힘으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내가 속상했다.

그런데, 그가 떠난 후, L 차장은 담담하게 나에게 이야기했다. 원래 이런 건 시켜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업무 밖의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해외지사에서 겪었던 일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여겨졌지만, 그리고 직격타라고 하기엔 일련의 사건들로 맷집이 상당했기에 의아했지만 그녀의 위로는 마음 깊숙이 와닿았다. 입사 후 내가 겪었던 일들이, 옳지 않다고, 정당한 일이 아니었다고 수면 밖으로 꺼내 준 것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근무했지만 누구도 잘못된 지시라고 직접적으로 짚어준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나 혼자만이 느끼는 부조리가 아니라는 것,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만으로도, 위안을 받았다. 나는 공감을 받고 싶었나 보다. 

비로소 E 팀장에게서, 긴 세월 동안의 어둠에서 조금은 벗어난 느낌이었다. 딱 한마디가 필요했나 보다. 잘못된 지시라고. 땡땡씨에게 시켜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가끔 생각해 본다. 그녀는 선생님 재질의 사람인 거 같다고.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이 있고 또 자애롭기도 하다. L 차장이 담임으로 있는 반은, 수다스러우면서도 정겨울 것 같다. 같이 오래 일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육아를 위해 집과 조금 더 가까운 지사로 이동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좀 더 가까울 수 있었음에도 틈을 주려 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조금 아쉽다. 


그녀는 다른 지사로 이동 후, 몇 년이 지나 팀장으로 승진했다. 회사에는 만년 차장이 수두룩한데, 어찌 된 모양이 내 주변엔 팀장 승진이 흔하다. 능력 있는 상사를 모셔서 그런 건지, 그만큼 노력하는 상사들을 만나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L 차장은 직원인 내가 보아도, 승진해야 마땅하다.  


그녀의 인품도, 성격도, 능력도, 그리고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친절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미 마음을 주었다. 내가 바라던, 이상향의 상사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데, 나의 그릇으로는 무리인 듯하다. 그리고, 그 많은 상사 중에는 처음으로, 그녀와는 다시 한번 만나 근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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