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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06. 2023

12-1. L 차장_그녀의 무기는 그녀 바로 자신

그들이 나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L 차장은 내가 민원업무에서 벗어나 한창 I 팀장에게 신임을 받으며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던 그때 나의 직속 차장으로 부임했다. 그녀에게는 이 지사와 업무가 처음이었고, 나는 나름 민원업무와 총괄업무에 적응을 어느 정도 마친 터라 그녀에게 대략적인 분위기를 설명할 수 있었다. 늘 긴장되는, 마음이 떨리는 상사들과 일하는 게 익숙해서 인지, 상사들이 처음 부임할 때는 한 발 떨어져 조용히 관찰하고는 했는데, L 차장은 겉보기에도 너그럽고 마음씨 좋아 보였다. 동그랗고 큰 눈에 맞는 동그란 안경테와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올라간 입술, 따뜻하게 상대방을 쳐다보는 눈동자. 자애로워 보이는 그녀의 나이대와는 맞지 않지만, 개구리 왕눈이의 아로미가 떠올랐다. 

 

부드러운 첫인상을 뒤로하고 전해 들은 그녀의 스펙은 압도적이었다. 흔히 말하는 S대 출신, 듣기만 해도 어려운 자격증 소지자, 주요 부서 출신에 아는 인맥도 옹골찼다. 얼마나 똑똑할까. 어떻게 일할까. 사람을 깔보지는 않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지레 내실 있는 스타일인가 싶어 겁먹고 꼼꼼하게 검토하고 결재를 올렸는데 시원시원하게 결재가 났다. 대략 파악할 부분만 물어보고 나머지는 직원에게 맡겼다. 직속 차장이 바뀌었지만 업무 방향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 일이란 게, 누가 오든 적응해야 했고, I 팀장이 1:1로 따로 지시하는 사항이 늘어나며 L 차장에 대한 나의 관심도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팀장의 사적인 지시는 보고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넌지시 알려주기는 해야 했다. 그래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혼자 뒤집어쓰지 않을 테고, 팀장도 의식하여 허무맹랑한 요구는 안 했을 테니. 일종의 보험처럼.

 

회사에 다니다 보면, 어떤 사람은 업무적으로 또 누군가는 인간관계에서, 그것도 아니라면 빠른 정보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걸 지켜보았는데, L 차장은 스펙은 덤이요, 무기는 그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L 차장은 사람이 참, 괜찮았다. 그렇다고 일적으로 문제가 있느냐 그건 아니었다. 아는 지식이 많아서인지, 하나의 업무를 처리할 때도 파생될 만한 문제점을 보안했기에 타 부서와 협의가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놓치기 쉬운 부분은 직원에게 한 번 더 일러주어 꼼꼼히 정리했지만, K 차장처럼 업무처리를 잘 포장한다던지 스스로의 업적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본인의 실적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인가 싶었다. 이미 대단한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인정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사람을 참 편하게 대했고, 상대방 역시 L 차장에게 마음을 주었다. 특별히 어떤 중요한 대화가 오고 간 게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갔고 다들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L 차장 참 괜찮다고. 적을 만들지 않는, 모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성격이 우리 회사와 잘 맞아떨어졌다. 

먼저 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내향형인 나조차도, 회사 내 누군가와 문제가 있었을 때 L 차장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대안을 알려주었다. 사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깊어진다는 건 회사에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까진 아니어도 아쉬운 관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빈번한데, L 차장은 적당히 마음을 나누고, 친절하게 정해진 선 안에서 대화하기엔 안성맞춤인 사람이자 상사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최고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바로 옆에서 근무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사적인 전화를 건너 듣기도 하는데, 그녀는 워킹맘이었다. 그 당시 내 주변인들의 절반 정도만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어도 육아휴직 중이라 일하는 엄마의 설움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생 자녀를 둔 L 차장은 참 힘들어 보였다. 딸이 학원을 갔다가 비가 온다고 전화가 왔고, 택시를 놓쳤다고 연락이 오기도 했고, 엄마가 필요한 순간순간 연락을 했다. 하교 후의 모든 일정에 그녀의 손이 들어갔다. 가끔 아이가 아프면 나까지 안타까웠다. 회사와 집이 멀어 출퇴근 시간도 한참일 텐데, 총괄 업무를 진행하고 야근도 잦은 터라 일과 육아의 양립이, 옆에서 보기에도 참 힘겨워 보였는데도, 그래도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일을 했다. 그녀의 상사, 동료, 직원에게 한결같이 친절했다. 친절하다고 호구처럼 우습게 굴지도 않았다. 적정선을 참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보면 정신승리 라기보단, 그녀의 성격인가 싶다.   

이쯤 되면 회식자리에서의 그녀가 참 궁금해진다. 


참 신기한 부분이, 딱히 중요한 일이 없는 회식자리라면, 특히 높은 상사를 모시는 자리엔 팀장, 차장 외 신입사원 같은 막내가 상석에 끼어 있다. 어색한 순간들을 메꾸고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 인 것 같은데, 이 지사에 전입하고 민원업무로, 그리고 총괄업무를 맡고 나서는 행사진행을 담당했기에 나에겐 높은 상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을 영광은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원활한 진행을 위해 상석 테이블의 분위기를 상시 체크해야 했는데, 신입사원의 역할이 눈에 들어왔다. 

신입사원은 조금 긴장해 보였지만, 회식자리에서도 열심히 하려는 의욕이 보였고, 그의 신선한 대화에 귀 기울이며 처장은 즐거워 보였다. 회식자리에서 룰은 딱 하나다. 제일 높은 자리의 사람이 만족하는 것. 그럼 자연히 팀장, 차장들도 만족한다. 딱딱하게 본인을 대하는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느슨해진 대화와 주제에 처장의 심기가 누그러졌고, 회식은 별다른 사건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이 자리를 위해 참 다양한 역할이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저 신입사원은 괜찮을까. 예전만큼 늦게까지 하는 회식은 아니지만, 나때처럼 노래방을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불편하지 않을까. 사실 누가 원해서 저 자리에 앉을까. 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간혹 야망이 눈에 가득한 신입사원을 보기도 하는데, 특출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회식에 참석하기도 싫을 것 같다. 

격세지감이었다. 저 자리에서 쩔쩔매고 있었을 내가, 이젠 사회를 보고 행사를 진행하다니. A 처장도 떠올랐고, B 차장, C 과장, E 팀장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 상사들이, 그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구나. 그들이 나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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