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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03. 2023

10. J 차장_은은하게 퍼지는 그의 향기

무던과 무심의 경계에서 평화를 얻다

흔히 무협지에 보면, 아주 깊고 깊은 산속에 은둔하여 살고 있는 고승이 나온다.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지만 왠지 무시할 수 없는, 조용하지만 말에 뼈가 있는 존재가 무거운 사람. J 차장은 재야의 고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덩치가 큰 개 같기도 하고, 눈매가 아래로 쳐져 순한 북극곰을 연상시켰다. 연배도 좀 있는 차장이었다. 퇴직을 앞둔 고참 차장이었는데, 승진 욕심은 포기하고 편안하게, 단조롭게 회사를 다니는 듯했다. 어떤 업무에도 여유가 느껴졌고, 직원을 다루는 일도, 상사에 보고하는 일도 아주 태연했다. 몇십 년을 근무하다 보면 J 차장처럼 되는 건가 싶었다. 초조해 보이지도 않고, 모든 일에 좀 심드렁해 보이는, 지루하다 못해 답답해 보였지만, 나는 그와 일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민원 업무에 한창 시달리고 있었다. 똑같은 서류를 요청해도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 달랐다. 제대로 준비해 오는 사람도 있는 반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경우도, 반말은 기본이요, 욕설도 종종 들리곤 했다. 하도 별별 사람을 겪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는데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고집을 부리면 슬쩍 믹스커피를 타 드리곤 했다. 물 양을 잘 맞춰서 그런지, 나중에는 아예 다방이 되어 한참을 앉아 있다 가셨지만 그래도 잘 쳐냈다. A 처장이 문득문득 생각났다.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하나는 배운 셈이다. 

 

진상 민원에 대처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는데, 내 전임자는 민원인의 반말에 똑같이 반말로 응수하며 본인의 화를 삭였고, 신입 직원은 오히려 더 깍듯하게 대하며 불평의 여지조차 만들지 않았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목소리를 부러 크게 내며 민원인의 기를 꺾는 과장도 있었고, 내 옆자리 직원은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라며 물어뜯고 일을 키웠다. 일부러 말을 툭툭 내뱉으며 자극을 하는데, 웬만한 진상들은 상급자를 찾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사무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상급자를 찾는 그 순간, 재야의 고수, J 차장이 등장한다.

 

내가 전입 오기 전까지 여러 차장들과 일한 부서 과장에 의하면, 대부분의 차장은 민원인에게 과하게 사과를 하며 좋은 말로 잘 설득시킨다고 했다. 직원에게 면박을 주면서. 

오죽하면, 민원인을 위한 테이블도 따로 있었는데, 사무실 칸막이 안이었다. 일단 들어오면, 한풀 꺾인다고 했다. 직원들로 둘러싸인 공간이라, 웬만한 민원도 잠시 소강된다고. 그렇게 분위기를 전환시킨 후, 부드럽게 타이른다고 했다.

그런데 J 차장은 달랐다. 가능한 한 직원이 처리하도록 지켜보지만, 민원인이 선을 넘으면 전후 사정을 듣고, 과감하게 소리도 질렀다. 고승이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차장의 권한만큼, 책임도 따르는 것이니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J 차장이 특이한 거라고 했다. 직원의 편에서 목소리 내는 차장은 거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직원들은 그를 좋아하면서도, 괴짜라고 수군거렸다. 

 

워낙 특이하고 다양한 상사들을 만나다 보니, 그래서는 안되지만, 나는 J 차장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았고 보고 타이밍은커녕 결재도 되는 대로 요청했다. 그만큼 서류들에 파묻혀 있기도 했지만, 그의 성향을 관찰해 보니 일만 무리 없이 진행되면, 직원들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한 번씩 그의 예리함에 놀라곤 했는데, 내가 그를 물로 보고 있다는 게 들킬 세라 지레 몸을 사렸다. 나도 참 간사한 사람인지라,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사람 좋은 상사를 만나니 발을 뻗다 못해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가끔씩 J 차장은 내가 과하다 싶으면 한두 마디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도 그뿐이었다. 

 

회식에서 그는 유독 맥주를 좋아했는데, 그와 장단을 맞춰 줄 회식형 인재가 부서에 거의 없었다. 다들 집에 빨리 가고 싶어 했고, 내가 신입사원 때와는 달리 시간이 흘러서 인지 죽어라 마시는 회식 분위기가 유야무야 사라져 있었다. 의기투합하고 싶은 사람끼리 소수로 만나 술잔을 기울였고, 나는 이제 회사 사람들보다는, 사적으로 만나는 지인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회식에서는 소극적이었고, 가능한 테이블 끝에 앉아 먹는데 집중했다. J 차장도 억지로 마시게 하는 압박형 상사는 아니었기에, 그리고 소문난 아내 바보라 2차는 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아주 깔끔하고, 바람직한 회식이었다.

 

그리고, I 팀장의 권유로 나는 부서 내에서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고, J 차장과는 오며 가며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동하고 싶다고 J 차장에게 이야기했을 때, 그는 역시나 호의적으로 업무를 다양하게 배우는 건 도움이 된다며 나를 든든하게 지원해 주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이제 손발이 맞는데 꼭 옮겨야 하냐며 싫은 내색을 비추기도 하는데, 그는 정말 대인배였다. 아니, 오히려 무심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회사 일은 회사 일일뿐이니까.

 

무던한 사람이라, 나같이 눈치를 보고 상사의 기색을 살피는 나에게는 그와의 업무는 편안한 휴식처였다. 그가 업무를 물어보면 나는 답했고, 공문이 내려오면 처리했다. 물론 민원은 피곤했지만, 그래도 물 흐르듯 지나갔다. 회사에 출근하는 게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았고, 고역이었던 해외지사의 근무 후유증이 J 차장과 일하는 평화로운 시간 안에서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만큼 마음이 편했다. 

더도 덜도 말고 이만큼만 같았으면, 꽤 만족스러운 회사 생활이었을 텐데, 나는 이동을 했고, 이제 그는 퇴직을 했다. 

 

지사장의 건배사가 떠올랐다. 인향만리라고. 꽃의 향기는 백리를 가고 술의 향기는 천리를 간다는데,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단다. J 차장은 나에게 그다지 의미 있는 상사는 아니었다. 입사 처음부터 되짚어 보자면, 존재감이 “강”과 “중간”이 많아 “약”은 뇌리에 스치지도 않았다. 상사몽을 쓸 때 J 차장은 리스트에 넣을까 말까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데 찬찬히 돌이켜 보니, 그의 미소가, 덤덤한 표정이, 무심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은은하게 그의 향기가 내 마음에 베였나 보다. 난초를 좋아하던 그가, 서서히 나에게 하나의 작은 의미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무던히 살아가고 있을 J 차장,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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