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시험에 떨어지다
한동안은 재미있었다. 단순 민원만 상대하다 업무 다운 머리 쓰는 일을 하니 효용감이 들었다. 자발적 야근도 하고, 다양한 보고서를 읽으며 업무 흐름을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주어진 일만 하고, 힘을 빼며 일상을 즐기던 나에서, 예전처럼 다시 추진력이 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 담당 차장은 겸직을 맡고 있어 사무실이 따로 있다 보니, I 팀장의 지시가 곧바로 나에게 떨어졌다. 해외지사의 반복이었다.
우물쭈물하거나 적당히 했어야 하는데, 나는 또 잘하고 싶은 마음에 뛰어 달렸다. 팀장이 지시한 사안에 굳이 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했고, 간단히 안내할 사항도 신경 써서 이메일로 공지했다. 내가 내 발 등을 찍은 거다. 누굴 탓할까. 그리고, I 팀장이 나의 노력을 눈치챘고, 쓸만하다 여겼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업무가 몰리기 시작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하나, 둘 생기더니 행사 주관도 맡게 되었다. 총괄 자리 인건 알았지만, 직원에게 맡기기엔 규모가 제법 컸다. I 팀장은 개인적인 친밀감보다는, 업무로만 상대를 평가했기에 내가 잘하고 있구나 여기면서도, 힘에 부쳤다. 그래도 바쁘게 다니며, 계획을 세우고 직원들에게 안내하며,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총괄 업무를 담당하다 보면 부서 간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 빈번한데, 저승사자인 I 팀장의 별명과 감사 출신이라는 그의 신분은, 업무를 진행하기 가히 효과적이었다. 별말하지 않았음에도 타 부서에서 도와주기도 했고, 젊은 직원이라고 무시당하지도 않았다. 그의 비호 아래,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업무를 진행시켰고 일종의 쾌감도 느끼고 있었다. 일이 재미있다 보니, 내가 차장이 되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계기이기도 했다.
부서 내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는 냉철하게 업무를 분석했고, 그의 지휘 아래 차장들은 토시 하나 달지 않고 그의 의견을 수렴했다. 말 많은 사무실에서, 업무의 교통정리가 확실해서 오히려 편했다. 한 명의 카리스마로 전체를 아우르니, 업무 담당자는 그의 핑계만 대면 손 안 대고 쉽게 일이 해결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만, 업무분장이 그에게는 중요치 않아 보였는데, 담당자의 업무가 아님에도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업무를 지시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에게 일이 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도, 그는 공치사에 확실한 사람이라, 잘하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칭찬을 했고, 그건 젊은 직원에게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승진 시험이 있었다.
나 역시 시험 대상이긴 했는데, 시험을 칠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꿈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고, 비록 일이 많아졌지만 저녁이 있는 삶이라 좀 더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I 팀장의 생각은 달랐다. 젊은 직원이 시험을 보고 차장이 되어 경험을 쌓아 회사를 발전시키고 등등 그 사람 시대적 발언을 했다.
그렇게 승진 시험을 화두로 고민해 보니,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지금 하는 업무에 당위성을 가지고 싶었다. 내가 다른 부서에 업무로 협조를 구할 때, 직원이라는 신분은 참 미묘했다. 차장들이 하대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정보를 오픈하지 않았고 바로 나의 윗상사인 차장에게 전화했다. 그 상황이 맞긴 했지만, 내가 중점으로 하고 있는 일인지라 속상하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가정이나 다른 곳에서 충족시켰어야 하는데, 업무에서, 회사에서, 사람 사이에서도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상하게, 승진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독서실을 끊었다.
C 과장을 기억해 보면, 하루의 절반을 회의실에서 공부하며 보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리에 앉아 공부할 시간은 확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시험은 1월 초였는데, 연말에는 회식이 넘쳤다. 그리고, 회식뿐일까. 행사도 많았는데, 나는 이제 I 팀장의 행사 담당자가 되어 전체 직원 행사, 팀 행사, 동호회 행사까지 세 가지 행사를 2주 안에 준비해야 했다. 회사에서는 행사 준비하랴, 회식 가랴, 퇴근해서는 독서실을 가랴 나는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바람은 바람대로 넣더니 환경은 제공해 주지 않는 칼 같은 I 팀장에게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B 차장 때처럼 우는소리를 하는 신입사원이 아니었고, 보란 듯이 모두 다 잘 해내고 싶었다. 회사에서의 배려는 필수가 아니니까.
그리고, 더 우스운 건 I 팀장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업무로 인정해 주는 그의 신임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다 나만의 착각이었던 듯하다.
사실, 그는 처장 승진 준비로 참 많이 바빴다. 출장도 잦았고, 사람들도 많이 드나들었다. 자질구레한 업무도 많았는데 내가 많이 차출될 수밖에 없었다. 처장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처장이 되었는데, 그 많은 행사는 그가 처장이 된 이후의 일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행사에 참여했고 그는 본인의 기쁨에 고양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는 나를 신경 쓸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담당 직원은 그의 기쁨조가 되어 행사를 준비하고 그는 즐기면 되었다. 나는 시험 2주 전까지도 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었고, 마지막 주에는 휴가를 내고 공부를 했다.
여담이지만, 공부는 참 재밌었다. 회사의 다양한 업무와 관련된 규정과 지침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실무적으로만 알던 나에게 이 회사가 뿌리가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모든 일에는, 그에 따른 근거가 있었다. 정신없이 일을 쳐내느라 자세히 알지 못했을 뿐.
짧은 회사 생활이었지만 누구보다 부서를 자주 옮기는 기회가 많았기에(?) 여러 업무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더 알차게 공부했다. 나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공부였는데, 그러다 보니 외우지는 않고 어머~ 그렇구나! 하며 소설책 읽듯 읽어 나갔다. 독서실이 문을 닫으면 집에 와서도 공부를 했는데 정말 흥미 위주였다. 시험을 시험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결과는 뻔했다. 처음 보는 시험에 나는 떨어졌다.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도 속상했지만, 환경을 제공해 주지 않은 I 팀장에게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니까, 행사를 좀 빼 주거나 나에게 덜 시키지 말던가. 하지만 다 내가 수레바퀴를 가속해서 밟으니 생긴 도미노 같은 현상인 거다. 지 팔자 지가 꼰다고, 내가 이것저것 손에 놓지 못하다가 결국 내가 손해를 입고 나서야 후회가 되었다.
합격자 발표날, 나는 휴가를 내고 퇴근을 했다. 동료들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이런 동정여론은 내가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는데. 다 잘하고 싶었는데. 그때의 나는, 회사에 다시 한번 배신당한 비련의 여주인공 같았다. 열심히 했는데, 정작 내 것은 챙기지 못한 모지리였다. 그리고, 승진한 I 팀장은 I 처장이 되어 이동을 했다.
나는, 여전히 행사 담당자로 남아 있었다.
I 팀장에게 나는 쓸모 있는 하나의 졸병이었을 거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는 사실 잘못한 게 없다. 그는 팀장으로서 업무를 지시한 거고, 나는 그 지시를 지나치게 따랐다. 딱히 권위적이지도 않았고, 권력으로 나를 뭉개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아침엔 뜨거운 물 한 잔이 몸에 좋다며 소소한 건강 팁을 전파하기도 했고, 고생한 날이면, 물론 법인카드로 직원들에게 소고기를 사주기도 했다. 스타벅스를 고집하며 커피도 챙겨주는 은근히 따뜻한 상사였다.
평화로운 이곳에서, 내가 많이 선을 넘었고 그는 잘 활용한 거다.
그는 내가 처음에 생각한 인자로운 저승사자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발톱을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정정한 호랑이였고, 나는 그가 걸어가는 꽃길에, 스쳐 지나가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젠 나도 안다. 현실은 냉정하고, 상사는 상사일 뿐이다.
상사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거리를 두고 사랑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