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아래 노곤노곤 구워지다
그는 E 팀장이 팀 내 질서를 확고히 다지고 난 뒤 전입했다. 그러니까 웰컴 투 더 E 팀장 월드였는데, 다른 차장들도 정도만 다를 뿐 힘들어 한 반면, 그는 비교적 조용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고 태연했다. E 팀장에게 지적을 받았을 때는 살짝 멈칫해 보였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하얀 얼굴에 딱딱한 안경을 썼는데, 무표정일 때는 근엄해 보였지만, 웃으면 참 인자했다. 회사에 입사 후 워낙 다양한 상사를 만난 터라, 이젠 누구든지 경계 가득하게 관찰하고 지켜보았는데 그는 타인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업무에도 주관이 뚜렷했다. 전임 차장의 보고는 참고만 하고, 본인 스스로 현지에 맞게 적용해서 진행했다. E 팀장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소신껏 업무를 처리했는데 그에게서 사회적 연륜이 느껴졌고, 일을 매끄럽게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직원을 다루는 방법도 능수능란했다. 나의 업무도 H 차장과 연관이 되어 있었는데, 그의 지시는 아주 명확해서 반가웠다. 내가 헷갈리지 않도록,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짚어주었고, 말투는 나긋나긋했다. 군대처럼 명령조가 당연한 사무실 생활에서, 나를 존중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니, 따뜻한 햇살 아래 노곤노곤 구워지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얼음이 녹는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아려왔다.
그리고 차장의 일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직원에게 넘기지 않고, 본인 업무는 본인이, 보고 역시 그가 도맡아 했다. 업무분장이 명확하지 않았을 때도, 차장의 일이라 생각하면 그가 진행했다.
그리고, 직원의 일이라면 가차 없이 지시했고, 중간 점검도 했으며, 끝까지 확인했다. 철두철미한 업무방식이었다. 그러니, 사소한 실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지시 아래에서 나는 평화를 찾았고 꼼꼼한 스타일에 조금 버겁긴 했으나, 업무 외적 스트레스는 전혀 없었다.
H 차장에게는 다른 직원도 있었는데, 그 직원도 또 나름 특이했다. 잘 잊어버리고 실수도 잦은 편이었는데 H 차장은 화내지 않고 조곤조곤 직원을 대했다. 계속 일러주고, 일깨워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뒷말도 없고, 충고도 없는, 일적인 관계. 직원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업무가 매끄럽게 진행되는 방향으로 직원을 대했는데, 그가 정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공과 사가 분명한 어른 같았다.
그렇다고 사적으로 선을 긋는 사람이냐, 그것도 아니었다. 회식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다가가면 으레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대화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우리 팀 누구도 기실 E 팀장과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았고, 분명 E 팀장도 한 예민한 성격에 그 분위기를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H 차장은 그렇지 않았다. E 팀장과 옆에 있는 것에 개의치 않아 했고, 나중에는 전담으로 마크한다고 여겨질 만큼 충실히 그를 보필했다.
사무실에서도, 회식에서도, 가끔 있는 운동도 그와 함께였다. 자애로운 태양 같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던 E 팀장도, 타박을 하면서도 H 차장은 데리고 다녔다. E 팀장도 혼자만 다니기는 외로웠을 거다. 아무리 거느리고 다녀도, 어거지로 붙들렸다는 걸 왜 모를까.
팀장이 회의로 부재 중일 때 몇몇 차장이 물었다. H 차장에게 괜찮냐고. 그러자 H 차장은 팀장님도 힘드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며 그를 두둔하고, 옅게 웃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H 차장이야말로 진정으로 내면이 강한 사람이 아닐까 여겨진다.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깊은 나무처럼 보였다. 이곳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평소 생활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훤하다. 사회생활의 정석 같은 H 차장, 그처럼만 한다면, 정말 성공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의 주변에 적이 없었으니까. 본인 성향이려나.
그는 유일하게 우리 팀에서 결혼을 장려했는데, 가족을 참 많이 아꼈다. 나에게도 본인이 늦게 결혼해서 참 아쉽다며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하라고, 축의 많이 하겠다고 결혼을 전도했다. 가족 이야기는 불문율처럼 다들 꺼내지 않는데, H 차장은 사적인 이야기가 다 가족이었다.
사실 H 차장과는 이렇다 할 이벤트가 없었다. 같이 일한 시간에 비해 사건사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회식자리에서는 술만 마셨으니까.
나와 업무가 연계가 되어 있지만, 정말 업무만 했다. 사설을 주고받아도 가족 이야기를 하고, 소소하게 안부를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H 차장은 참 기억에 남는다.
곁을 주지 않아도, 차갑지 않아도 상사로서 상사 다운 업무와 상사 다운 품위를 지닌 사람으로 회상된다.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니콘 같은 상사. 그래서, H 차장에 대해 적었다. 그래, 이런 상사도 있다. 현실에서 정말 찾기 어렵지만, 있기는 있다.
몇 년 후,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가 팀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놀랍지 않았다. 그는 진정으로 상사에게, 동료에게, 직원에게 골고루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어디선가 그의 팀을 나긋한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철저하게 지휘하고 있을 것이다. H 팀장님, 건강 챙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