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냄새가 뚝뚝 흘러내리는
회식자리에서만큼은 G 차장의 활약이 뛰어났는데, 일단 재미있었고 E 팀장의 비위도 유독 잘 맞췄다. 술상무라고 하던가?
모두가 높은 자리에 고고하게 앉아 있을 수 없듯이 누군가는 웃음을 주고 풍악을 연주하며, 누군가는 아양을 떨어야 했다. 그리고 누구든 각자의 무기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실력이든, 경험이든, 술이든.
나는 이제 사무실에서나 회식에서나 숨만 쉬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술자리 사회를 보던 그가 마이크를 가져와 한 명씩 노래를 시켰다. 부르고 싶은 사람만 부르면 되었을 텐데, 굳이 내 앞으로 가지고 왔다. 나는 더 이상 B 차장과 일하던 신입사원이 아니었고, C 과장이 시키는 대로 지사장 옆자리에서 술잔을 챙기던 아마추어도 아니었다.
그저 존재했다. 회식에서는 E 팀장 옆에 그림자처럼 앉아만 있었고, 웃음도 울음도 표정도 없었다. 그래야 관심을 덜 받았고, 그래야 덜 피곤했다. 내가 존재감이 흐릿해야 다가오지 않았고, 그래야 E 팀장이 나를 덜 건드렸다.
G 차장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나에게만 보이게. “도와줘 땡땡씨.”
상황은 반전되었다. E 팀장의 마수로부터 도와준다던 G 차장이 내게 오히려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이건 업무도 아니고 실적도 아닌, 사회생활이었다. 나는 그 사회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그런 나에게, 상황에 절절매는 G 차장이 안타까웠고 하찮았다.
나는 거절했다. 끝까지 앉아만 있었고 마이크에는 손 하나 대지 않았다. 하도 권력자에게 당하다 보니, 그 아랫것들은 시원찮게 보였다. 여전히 내 상사이고, 내가 밉보이지 않아야 할 대상임에도, 우스웠다. 그깟 게 뭐라고. 지금 잘 보이면 뭐 하냐고. 어차피 내일 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인데. 왜 그렇게 사람들은 이 구렁텅이로 뛰어들까. 무엇을 위해.
나는 무기력했고, 무감각했고, 매사에 무관심해졌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G 차장은 사무실에서는 참 많이 혼났는데, 가끔은 정말 E 팀장이 선을 넘었다. 결재판으로 G 차장을 툭툭 치기도 했고, 초등학교만 나와도 너보다는 잘하겠다며 인신공격을 해댔다. G 차장은 묵묵히 견뎠고, 한 번은 거의 폭발 지경까지 갔었다. 그래도 그는 잘 참아냈다.
E 팀장이 처장회의에 가면, G 차장은 날개를 단 듯 사무실을 활보했다. 팀 내 차장들과 커피를 마시며 E 팀장 흉을 보기도 했고, 정말 힘들다며 하소연도 했지만, 그만의 특유한 유쾌함으로 농담 따먹기를 시전 했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엄청 긴장하고 무서운 와중에, 툭 한마디 던지면, 어느새 다들 따라 웃고 있는. G 차장은 참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E 팀장이 국내로 복귀했다. 이 사무실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G 차장이 본연의 색을 확실히 되찾았다. 시끌벅적해졌고, 더 많이 웃었고, 목소리도 커졌는데, 그럼에도 더 신중해 보였다.
나름의 경계심이 생긴 것인지, E 팀장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진중한 면이 보이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보고서 검수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내가 복귀를 할 때, 참 많이 아쉬웠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야지, 도망가야지 했는데 막상 떠난다니, 앞으로 다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허무해졌었나. 사무실에서는 운 적이 없었는데, 떠나는 마당에 눈물이 났다. 그런데, G 차장이 그걸 봤다. 그는 나의 약한 모습에 당황해 보였다. 매번 잘린 통나무 마냥 뻣뻣이 있던 애가 감정이 있었네? 하는 의아함. 좀 더 챙겨줄걸 하는 미안함도 얼핏 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다 각자 고생했으니.
복귀 후에는 자연스레 연락하지 않았다. 나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나는 연락을 잘하지 않는다. 그게 누구든. 그리고, 여기, 이 삭막한 곳의 사람들과는 하라고 해도 연락을 선뜻하기 두렵다. 그때의 감정들을 다시 일깨우고 싶지 않아서인지, 피하고 싶어 진다.
그럼에도, E 팀장의 단골 건배사인 이 멤버 리멤버처럼, G 차장의 얼굴 역시 선명하게 떠오른다. 맥주잔을 들고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인간적인 그, 어디선가 투덜투덜하며 일하고 있을 그. 사람냄새가 뚝뚝 흘러내리는, 상사 중에 상사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