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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너리 Oct 01. 2023

9-1. I 팀장_인자로워 보이는 저승사자

민원업무를 시작하다 

발령이 났다. 부서가 정해졌고, 조직도에서 I 팀장을 찾아보았다. 사진 속 그는 단호하고, 냉철해 보였다. 

좁은 회사다 보니, 그를 알거나 소문을 들은 차장들이 조언해 주었다. 그는 감사 부서에서 오래 일했으니, 처신을 조심해야 한다고. 물론 이제는 그런 조언도 귓등으로 듣지 않고 머리 한구석에 잘 입력했다. 사소한 실마리라도 놓치지 않아야 고생하지 않으니. 그리고, 실제와는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 두었다. 

상사란 까면 깔수록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참 매력적인 사람들인데, I 팀장도 그럴지 누가 알겠는가.  

 

전입 후, I 팀장을 사무실에서 마주했다. 한눈에 봐도 큰 키, 늘씬한 몸매, 어두운 낯빛 그리고 날카로운 눈. 겉으로 보기에 그런 모습을 하고 있기는 했는데, 이곳에서 그의 별명은 저승사자라고 했다. 처음 인사를 하며 눈이 마주쳤는데 악명에 비해선 인자로워 보였다. 무자비한 그의 소문은 과거의 영광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지 않은가. 한창 이름을 날리다가 이제 말년을 앞두고 몸도 마음도 기운이 빠지는 상황. 그리고 그 과거가 지금의 힘없는 그를 힘겹게 지탱해 주고 있는. 종이호랑이처럼.

 

직원 비율이 높아서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는 부드럽고 유연했다. 다 같이 모여 커피 한 잔을 하는 여유도 있었다. 직원들 연령대도 다양했고, 상사라고 함부로 할 수 없는, 듬직한 고참 과장들도 여럿 있어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이제는 나름 중견 직원이라 생각했지만, 여기선 거의 막내였다. 

땡땡씨는 너무 딱딱하다~라는 핀잔도 들었지만, 살갑게 선배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상사뿐만 아니라, 직원들 과도 내가 그은 선을 그들이 넘지 않도록 틈을 주지 않았다. 팀장과 가끔 이야기할 때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의식적으로 미소 짓지 않으려 애썼는데, 인간적으로라도 가까워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E 팀장의 영향 아래 있었다. 

 

많이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의 업무는, 팀장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민원 담당이었다. 새로 전입 온 직원이 민원업무를 담당하는데, 대부분의 동료들은 민원 업무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일단 감정적으로 피곤했다. 끊임없는 서류 입력과 빗발친 전화 문의로 정신적으로, 사람에 치이는 반복적 업무였다. 기계적으로 컴퓨터를 쳐다보고 다들 싫어하는 업무를 맡다 보니, 오며 가며 힘들지~ 하는 동정여론도 사보고, 다른 회사인가 싶었다.

처음 받은 전화가 하필 진상 민원이었는데, 대뜸 수화기 너머로 욕을 했다. “이 망할 년 같으니”라며. 살면서 욕을 안 들어본 건 아니지만, 새롭긴 했다.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는데, 세상에는 생각보다, 정상인의 범주 안에 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별별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기가 빨리면, 집에 가서 멍하니 누워있어야 충전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마음이 편했다. 보고 타이밍을 노리며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고, 내 팔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주어진 서류만 화면에 입력하면 아무도 날 건들지 않았다. 6시면 퇴근을 하고, 동생과 치킨을 먹는데 이게 행복이라며 신나던 기억이 있다. 나는 소소한 일상을 그리워했었고, 6시 이후엔 자유라는 게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마음대로 웃을 수 있고, 어디를 가도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얽매이지 않고 속박당하지 않는 삶.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하루가,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그 향기에 취하다 보니 민원업무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민원에, 특히 전화에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다. 그래도, 퇴근길은 즐거웠고, 팀장이나 차장과도 별 특이한 일 없이 지나갔다. 민원 업무이기 때문에 웬만한 행사에도 빠질 구실이 되었고, 사실 내방 민원이 많아 자리를 비우기도 어려웠다. 

하도 사람들을 자주 대하다 보니, 이제는 누가 들어왔을 때 얼굴에 느껴지는 기운 만으로도 진상인지 아닌지 식별이 되었다. 감이 발달한 셈인데, 백발백중은 아니지만 대게 맞아떨어졌고, 옆 동료와 함께 눈을 마주치며 서로 위안을 얻었다.       


민원업무의 성격상 오래 하다 보면 몸이 아파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사 내 민원담당자들은 약이란 약은 다 챙겨 먹는데도 늘 골골댔다. 손가락이나 손목이 아프거나, 어깨가 아픈 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민원업무의 근무기한을 정해 번갈아 일했는데, 내가 근무기한을 다 채우기 전에, 후배인 직원이 전입 오게 되었다. 

I 팀장이 나를 불러 다른 업무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내 의중을 물어보았다. 여러 다른 부서의 보고서를 취합하고 감사의 결재를 받는 까다로운 업무이고 고참 직원들이 주로 일을 안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배치되는 보직이라고 했다. 이 지사 업무의 꽃이라나. 그런데, 그 꽃이라는 업무를 이 지사 저 지사 다니면서 어쩌다 보니 두루 접한 나로선, 그 많은 꽃들은 그저 포장에 불과한 것 같다. 다들 얼른 던지고 피하고 싶은 폭탄 돌리기처럼. 정황상 몇몇은 이미 그 자리를 꺼려했고, 나는 꽃밭 체질인지 기회가 또 주어졌다. 

어려운 업무이냐, 민원 업무이냐 도긴개긴이었다. 그래도, 후배보다는 선배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는 I 팀장의 배려로, 나에게 공이 던져졌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고, 굳이 1년 동안 한 민원업무를 계속해야 하나 의구심도 일었다. 또, 멀리서 나마 꾸준히 관찰한 바, I 팀장은 차장들을 통해 업무지시를 하고 직원들과는 사적으로 대하지 않았을뿐더러, 행동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래서, 나는 같은 부서 내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의욕이 여전히 앞서는, 아직은 배우고 싶은 열정이 남아있는 청춘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보건대, 업무가 자주 바뀌어 깊이 있기보다는 넓게 아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가 되어버렸다. 알긴 아는데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얕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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