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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갑 Dec 15. 2023

목표를 잃은 방황의 시간

여러분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요? 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지 상상해 보신 적 있나요? 원하는 삶이 뚜렷이 보이나요? 아니면 안갯속을 걷는 것처럼 시야가 희미한가요? 저마다 서로 다른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군가에겐 가슴 뛰고 설레는 꿈, 누군가에겐 살아가고 버텨내는 동력,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막연한 개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삶의 목표가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생애주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달라지기도 합니다. 학창 시절에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의 장래 희망을 조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생활기록부를 떼어보니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기도 하였고, 몇 년 동안은 유지되기도 하였습니다. 

글쓴이의 고교 생활기록부. 그땐 언론인이 꿈이었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과 압박이 커집니다. 어떤 분들은 특정한 직업이나 직종을 고르는가 하면, 다른 분들은 전문직 자격증이나 공직 임용을 인생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가족을 이루게 된다면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자 애씁니다. 경제적으로는 내 집 마련이나 조기 은퇴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목표를 향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소박하지만 고귀한 삶의 목표도 있고, 원대하면서도 가슴 벅찬 삶의 목표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이들과 달리 삶의 목표를 가슴에 품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애당초 그런 걸 가져보지 못했거나, 갖고 있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된 사람도 있겠죠. 잠시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하루하루 무난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삶의 목표를 새롭게 찾았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새로 찾았다는 말은 한동안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 인생의 최근 몇 년 정도를 돌아보면서, 삶의 의미가 흐려진 과정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삶의 목표에 대한 고민은 답이 없었다.

저의 인생 목표도 삶의 굴곡을 따라서 가라앉기도 하고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도무지 감을 잡기가 쉽지 않더군요.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반드시 답을 구해야 할 것 같은 질문들. 하지만 항상 막연하게 느껴졌고 어떤 답을 내려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마치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신경 쓰이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는 골칫거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삶에 대한 의문은 이따금씩 머릿속에 떠올라 저를 괴롭히곤 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요.


문득 왜 사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삶의 목적이라는 게 있을까? 즐겁게 살다가 가면 그만인 걸까? YOLO 하다가 GOLO 간다는 말이 있지만, 대부분은 YOLO도 못해보고 GOLO 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의문이 뜬금없는 것 같으면서도 익숙하기도 한 것 같다.

2023. 06. 15


삶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머리가 무척 아파집니다. 그 대신에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떤 결정을, 왜 내렸는지' 따져보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인생의 궤적도 일관될 것입니다.) 


대학원에 진학한 동기: (가짜) 재능, 사회적 공헌!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을 떠올려 봅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정해야 했습니다. 가여운 대학생이 생각해 낸 것은 대학원생 되기. 저는 전공 공부를 꽤 즐기기도 했고, 논문 경시 대회에서 수상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재능이 있을지도? 물론 상 한 번 우연히 탔다고 해서 재능이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재능보다는 지속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땐 그런 부분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잘하는지, 혹은 어떤 일을 오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면, 그 일의 가장 단순한 형태를 자주 겪어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미술 회화에 관해서는 연필 스케치를 자주 해본다거나, 체육이나 운동에 관해서는 적어도 걷거나 달리기를 자주 해보는 식으로요. 저는 연구에 관해서는 논문을 직접 써보는 경험이 한참 모자라지 않았나 싶습니다. 재능? 그게 뭔데? 그때의 제 자신에게 캐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편 연구자가 되어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로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워졌지만, 사회의 이곳저곳으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나 저의 교육에 있어서는 장학금을 받거나 학비를 면제받은 일들이 큰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그러한 도움으로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무척 감사한 일이었죠. 아마도 대학 교육은 제가 살면서 누려온 것들 중에 가장 사치스러운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보답해야겠다고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힘들고 오래 걸리더라도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습니다. (돈 벌면서 해도 되는데...)


나의 대학원 과정에 대한 아쉬움.

(가짜) 재능과 사회적 공헌. 이 두 가지는 대학원 진학을 부추기는 훌륭한 명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굉장히 허술한 의사 결정이었습니다. 대학원 과정은 큰 비용이 드는 투자입니다. 그 비용은 시간과 등록금입니다. 당시에 비용에 대해서는 깊이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학비는 대출로 몇 년 간 버티고, 생활비는 다른 일을 병행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과연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과 책임감이 있었다면, 진로 결정을 그렇게 성급하게 했을까? 지나간 일이지만 새삼 아쉬움이 남습니다. 대학원 진학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대비책을 세심하게 준비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는 말이죠.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일과 학업의 균형을 조율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논문을 잘 쓰기 위해서는 학업에 시간을 투자해야 했지만, 왜인지 그런 시간은 항상 모자라다고 느꼈습니다. 그밖에 개인적인 어려움이 겹치면서 자주 낙담하고 무기력해졌습니다. 건강이 서서히 악화되면서 결국 학교에서 도망치기로 했습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의 일이었네요. 안타깝지만 학위 과정은 무기한 연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미련했던 그 시절 나에게 미련이 남습니다. 그동안 자책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물렁한 꿈이었기 때문에 후회나 낭패감이 큰 것이구나. 진솔한 꿈이었다면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후회하진 않았겠지. 최선의 의미는 조금 미묘합니다. 열심히 하긴 했지만 최선을 다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거의 자정이 될 때까지 연구실에 머물렀지만, 그다지 실속이 없는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네요.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것은 최선의 노력이 아닙니다. 단순히 많은 시간을 투입하는 것을 넘어서, 양질의 산출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원생의 산출물이란 논문인데요. 지금 돌아보면 항상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스스로에게 엄격하기만 한 것이 제 발목을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 당시의 지도교수님은 어디에 자랑하고 싶을 만큼 젠틀하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연구실의 선배나 동료들도 제가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도와주실 분들이었고요. 그런데 무언가 여쭙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무척 어려웠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러한 성격 상의 문제가 홀로 고립되고 부진에 빠진 원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에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반복됩니다.


물론 대학원 과정에서 제가 잘했고 좋아한 부분도 있습니다. 일단은 수업을 듣거나 여러 논문을 읽는 게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이 쓴 기가 막힌 논문들. 나도 언젠가 저런 논문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감탄과 설렘도 있었습니다. 저는 날카로운 질문을 많이 던졌습니다. 대학원에서는 세미나라고 불리는 형태의 수업이나 모임이 있는데요. 대학원생들이 각자 연구 중인 논문에 대해서 발표하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자리입니다. 저는 특히 세미나 중에 질문을 퍼붓고 날뛰었습니다. 학교를 떠나기 전 마지막 세미나에서도 열심히 질문을 했는데, 어느 교수님께서 '저렇게 잘하는데 왜 관두냐' 하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동료 학생들은 싫어하셨을지도... 죄송합니다.)


직장인의 삶은 안정적이었지만,

학업을 관두기로 하였을 때 저는 이미 서른 살이었습니다. 그 시점엔 몸과 마음이 꽤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그러한 고민을 위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대학원에서 배운 걸 써먹을 수 있는 직종으로 가자. 막연하게 방향을 정하고 취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당장 학자금 대출 상환이 다가와서, 하루빨리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났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어느 IT 회사에서 단기 계약직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계약 기간은 세 달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감사하게도 정규직 입사를 제안받게 됩니다. 중소기업은 사람 뽑기가 힘들었고, 저는 안정적인 급여가 필요했습니다. 뚜렷한 목표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되는 대로 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회사에 3년 넘게 머무르면서 원래의 전공과는 동떨어진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IT 분야의 전망이 괜찮지 않을까? 이번에도 허술한 의사 결정을 반복합니다.


다행히 직장 생활은 안정적으로 굴러갔습니다. 다달이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은 달달했습니다. 새로 배우는 일도 재미있었습니다. 평생 그때만큼 풍족하고 안정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에 완벽한 환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가려면 최소한의 안정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배웠습니다. 경제적인 것이든 정서적인 것이든. 매 끼니 적절하게 챙겨 먹을 수 있었고, 여가 시간에 마음 놓고 쉴 수 있었고, 여러 취미 활동도 즐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보살핀다는 느낌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이 서른 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스스로를 돌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득 대학원생 시절에 살았던 작은 방이 떠오르네요. 월세를 최대한 아껴보겠다고 1~2평 정도의 좁은 방에 살았습니다. 벽지에 곰팡이가 번지고 창밖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들어오는 방.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을까요. 하하. 열심히 갈아 넣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나 봅니다. 나에게 돌봄이 필요했다는 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단상이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회의감은 여전했다.

아무쪼록 직장 생활은 만족스러웠고 삶의 질도 점점 개선됐습니다. 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 투성이었습니다. 회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더 큰 역할과 보상을 받으면 어떨까? 경력을 쌓고 이력서를 꾸며서 더 좋은 기업으로 이직할까? 다들 벼락부자가 되기도 하고 벼락 거지가 되기도 하는데, 내 삶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마음 가는 곳도 없었습니다. 너무 막연하지 않나요? 나는 왜 승진, 이직, 연봉, 자산 등을 원하는 걸까요?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찾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인생 목표라고 생각한 것들이 어쩌면 가짜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 목표들은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하고 있었나?


내가 원한다는 것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로 세운 목표는 누구를 위한 목표였을까요? 내가 원한다고 생각한 것들은 사실 남들이 원하는 것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남'이란 가깝게는 가족에서부터 멀게는 미디어나 사회적인 통념까지. 우리의 욕망과 불안을 동시에 주무르는 외부의 것들을 가리킵니다. 흔히 어떠한 직업을 갖겠다, 얼마만큼의 자산을 쌓겠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겠다와 같은 목표들을 세웁니다. 이들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는 와닿지 않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경제적 목표 이면에는 다른 욕구들이 숨겨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모나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남들이 정한 표준을 충족함으로써 안도하려는 욕구, 결혼시장에서 선택받고 싶은 욕구, 그리하여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그런 욕구를 채우는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각자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니깐요. 그런데 조금 의아합니다. 그러한 삶에서 '나 자신'은 어디에 있나요? 물질적이거나 정서적인 목표로부터 영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삶에서 반복되는 문제와 직장 스트레스

저의 직장 생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경력에 비해 실력이 모자란 사람, 혹은 그러한 사람의 경력 연수를 두고 물경력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물경력을 쌓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는 성장하는 속도에 맞추어, 적절한 난이도의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맡은 업무가 익숙해지면 새로운 역할을 받고 후임자를 키울 수 있어야 하지만, 여건 상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실력을 뛰어넘는 너무 어려운 일을 받아서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저는 아마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했던 것 같습니다. 입사 초기부터 맡은 일은 다소 반복적이어서 익숙해졌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업무였죠. 대신에 다른 직무의 일을 조금씩 맡아보기도 하였는데, 제 실력에 비해서 과도한 역할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윗사람에게 무언가 여쭙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어려워했는데요. 이로 인해 직장에서 성과와 소통 문제로 점점 고통받기 시작합니다.


그 무렵 집 근처에 새로운 심리 상담 센터가 개업합니다. 성격의 문제, 직장에서의 어려움, 그리고 여기에 쓰지 않은 몇 가지 다른 계기로 상담 센터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다른 계기들은 시리즈의 후반부나 다른 글을 통해서 다뤄볼까 합니다.) 예약 내역을 다시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간절하게 쓰여 있네요.


제 삶을 더 힘들게 만들고 저의 잠재력을 갉아먹는 무언가가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 중략...) 요즘 혼자서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과거를 돌아보곤 하지만, 명확한 답을 찾기가 어려워서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상담 예약 문의, 2023. 03. 18


원래 심리상담에 대해서는 비용도 부담스럽다고 느꼈고, 어떤 심각한 문제에 처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대학원 다니던 시기에 심각한 문제에 처했고, 심리상담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심리상담이 마음과 정신에 대한 PT라고 생각하니, 값진 투자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개인 PT를 통해서 운동하는 법을 배우면 신체를 더욱 잘 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심리상담을 통해 마음과 정신을 잘 다루는 법을 배우면, 나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막연하고 답답한 마음과 기대되는 마음을 동시에 품고서, 첫 상담 예약을 확정했습니다.


지난봄부터 여름까지 총 여덟 번의 세션을 다녀왔습니다. 상담은 그 자체로도 대단히 유익했지만, 상담을 계기로 자아 성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 자신에 대해서 애써 외면한 감정들, 흘러가는 대로 두었던 생각들. 그리고 지나간 삶과 경험들. 그런 것들을 상담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끄집어내거나, 끄집어낸 것들을 글로 써보거나, 글 쓰면서 떠오르는 것들을 또 다른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여러 결핍과 진로의 난항을 겪으면서 주눅 들고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응어리들을 하나둘씩 정돈하기 시작했습니다.




막상 개인적인 글을 게시하려고 하니, 얼마나 드러내도 좋을지 망설이게 되네요. 군데군데 너무 추상적인 내용들도 보여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피드백을 주시면 감사히 수용하겠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면 제가 글을 잘못 쓴 탓입니다. 질문이나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다음 화에서는 상담을 받으면서 달라진 것들을 다루어보겠습니다. 첫 상담이 3월 하순이었고, 그로부터 6개월 뒤에 직장을 관두게 됩니다. 짧은 기간 동안 삶에 대한 관점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 의식의 전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이번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주 동안 잘 보내시고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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