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받다.
어김없이 주말이 되면 약속하지 않았어도 약속한 사람처럼 나는 늘 그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의 나는 나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며느리로, 시간을 죽이며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던 어느 날부터 어머님은 종교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람은 종교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인생이 바르게 간다고.
아이가 어려 다니기 힘들다는 나의 말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이가 두 살이 되자 이야기는 더 노골적으로 바뀌었다.
“이제 성당 다녀야지.”
“종교는 꼭 있어야 해.”
무교였던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종교를
매번 만날 때마다 세뇌당하듯 들어야 했다.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무교인 분은 시아버님이었다.
아버님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나도 무교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믿었던 그분조차 결국은 그 집 사람이었다.
아버님은 퇴직하면 성당에 다닐 거라고 했고,
종교가 있으면 좋다며 말끝을 흐리더니
결혼 전에 다녀왔다는 유명한 철학관 이야기를 꺼냈다.
철학관에서 받아왔다는
한자가 빼곡한 흰 종이 위에는
그래프와 숫자, 알 수 없는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종이 속의 나는
남편 복이 많고,
종교가 있으면 더 좋다고 적혀 있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너무 잘 알았기에
만날 때마다 이어질 강요에 지친 나는
결국 그들이 원하는 선택을 했다.
성당에 가기로 했다.
세례를 받기로 했다.
믿어서 가는 게 아니라
다니다 보면 믿음이 생길 거라는
그들의 논리에 나 자신을 설득하면서.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나는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성당 문을 열었다.
10개월 가까이 주말마다 세례 수업을 들었다.
국사와 국어를 좋아하던 나는
성경 이야기가 교리보다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져
그 나름의 재미로 듣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세례를 받아도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주말 미사도 점점 발길이 뜸해졌다.
성당을 다니는 동안
주말 아침마다 내 휴대폰은 같은 질문으로 울렸다.
“미사는 다녀왔니?”
나의 대답은 점점 “아니요”가 되었다.
그러자 다시 시작됐다.
가야 한다. 다녀야 한다.
나는 말했다.
“노력하면 믿음이 생길 줄 알았는데, 생기지 않아요.
믿음이 생기면 다닐게요. 그땐 다른 종교 말고, 성당으로요.”
‘네, 네’ 해야 할 며느리가 ‘아니요’를 말했기 때문에
어머님은 언성을 높였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세례를 받았어?!”
10개월이라는 시간과 노력이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나 보다.
아니, 내가 만만했던 거다.
그때 분명히 느꼈다.
이 집 며느리에게는
종교의 자유조차 없다는 걸.
왜 나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고
내가 생각한 대로는 살 수 없는 걸까.
분노는 점점 쌓였고
나는 되물었다.
영아세례를 받고도 성당에 다니지 않는
모태신앙인 남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왜 무교에서 믿음을 가져보려 애쓴 나에게만 화를 내느냐고.
어머님이 천주교라서 다녔고,
그래도 믿음이 생기지 않아
믿음이 생기면 천주교를 택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화낼 일인가요?
고분고분하지 않은 며느리의 말에
어머님은 더 화가 나셨다.
“네가 성당에 나가야
네 남편도 다시 나갈 거 아니야!”
그제야 알았다.
이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통제의 문제라는 걸.
강요에 의해 성당에 다니던 10개월 동안
나는 기도할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이 상황을 현명하게 헤쳐 나갈 지혜를 달라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들이 나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한다는 느낌은
끝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에서 서서히 그들을 놓아버렸다.
잘 보이려고 애쓰며 계속 다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잘 지내려 애쓰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에겐 나는 한 사람이 아니라
말 잘 듣는 며느리여야 했으니까.
이 글은 그저 나 스스로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다. 잘 견뎌왔고, 그만큼 성장했다.”라고
다독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만약 이 글이 당신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면,
당신에게도 같은 말을 건네고 싶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지금의 마음도,
이 시간도,
결국은 흘러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