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지키기는 어려워
“누군가를 용서하는 게 정말 나를 위한 걸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용서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되기 위해 용서했다. -사이먼 위젠탈
수업시간에 이 문장을 접했다.
사이먼 위젠탈은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위젠탈은 어느 날 한 간호사로부터 독일 군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유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 한다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위젠탈은 병실로 가서 그 군인의 고백을 듣고, 그가 용서를 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위젠탈은 말없이 병실을 떠나버렸다.
그는 자신이 용서할 권한이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고, 이후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그를 용서했겠습니까?"
늘 당연하듯 믿고 있던 ‘용서’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용서를 ‘나를 위한 일’이라 생각해 왔다.
용서는 감정의 해방이라고도 하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미움과 분노가 나를 갉아먹을 거라고.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여겨왔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되기 위해 용서한다’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일까.
그건 어쩌면, 단순히 상처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남기 위한 결심일 것 같다.
사실 우리는 너무 자주 ‘용서’를 당연한 덕목처럼 배운다.
“그쯤은 이해해 줘야지.”
“용서하지 않으면 네가 더 괴로워.”
“좋은 사람은 결국 다 품어주는 법이야.”
이런 말들 앞에서 분노를 느끼는 내가 미성숙한 것 같고, 상처를 붙잡고 있는 내가 어리석은 사람처럼 느끼는 경우도 많을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억지로 이해하는 척, 괜찮은 척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
용서는 감정을 무시하고 뛰어넘는 일이 아니라 그 감정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왜 아팠는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를 하나하나 짚어보는 일.
정체성을 지킨다는 건 어렵다.
“나는 내가 되기 위해 용서했다.”
그래도 그 말은 이제 단순한 도덕적 선언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조용한 다짐같다.
상처와 기억을 억지로 덮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 스스로 선택한 결과.
용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