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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오버'되지 않는 법

나의 일탈일지

by 뿡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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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逸脫)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정하여진 영역에서 벗어난다.

일탈은 이런 뜻이다.

일탈에 대해 얘기를 하면 나는 입을 더 다물게 된다.


몇 년 전 지인들과 모였을 때 지금까지 했던 일 중 가장 큰 일탈이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었다.

다들 돌아가며 얘기하고 내 차례가 다가오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중2병이라고 불리는 시기의 감정 변화를 제외하면 딱히 없었다.

생각을 하다 하다 결국 고등학생 때 야자를 빠지고 떡볶이 먹으러 간 일을 말했다.

그게 뭐냐, 겨우 그거냐는 소리를 들으며 웃고 말았지만 모임에서 돌아오는 길에 '내 인생의 일탈은 없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탈을 하고 싶었던 적은 있었나?

대학생 때 늘 3호선 지하철을 타고 통학했는데 '오금행'열차를 타며 언젠가는 수업에 가지 않고 오금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늘 가던 학교 앞 말고 그날 갑자기 내리고 싶은 역에서 내려보고 싶다는 생각.

그것마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생 때 일종의 일탈을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게 몸에 밴 사람이다.

그게 편하고, 익숙하고.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정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걸 즐기는 사람.

일탈과는 아주 아주 거리가 먼 사람.

한마디로 파워 J(MBTI 신봉자는 아님).

모든 일에 그렇지는 않지만, 내 삶을 만들어가는 계획에 있어서 특히 그런 편이다.


나도 이런 내가 힘들 때가 있다.

가려던 길로 가지 못하면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초조해지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만들고 싶은 맘이 들 때.

강박적으로 그 길로 가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애쓸 때.

멈춰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며칠 전에 하지현 작가님의 책 <아무튼, 명언>을 읽다가 아래 내용을 필사해 두었다.

이때 떠오르는 것이 일본 철도회사 JR의 '청춘 18'티켓의 광고 카피다. 광고 카피는 '청춘'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를 여행에 비유해 건네는데, 인상적인 내용이 많다. 이런 카피가 대표적이다.

<아아, 여기다, 내리고 싶은 역이 분명히 있다>

삶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으로 열려 있어서 계획보다 우연의 힘이 더 강할 때도 있다. 막히던 일이 우연한 시도에서 실마리를 얻어 풀릴 때도 많다.
마음과 시간, 에너지의 여유를 갖고 있으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처음 잡은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갑자기 난처한 일들이 밀고 들어와도 놀라거나 좌절하지 않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이럴 때 열린 마음으로 '여기다 싶은 역'이 있는지 둘러볼 수 있다. 그 '역'이 의외의 길로 나를 이끌기도 한다. 뻔할 뻔했는데 덕분에 흥미로워질 일들을 잘 겪어내며, 다음 역을 기다려본다.

읽으면서 오금역 생각이 났다.

그냥 3호선 열차에 몸을 싣고 가다가 맘이 끌리는 역에서 한 번 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난 그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나 싶었다.

즉흥 지하철 여행을 생각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나.

이런 문장들에 지금도 이끌려서 노트에 예쁘게 적어두지만 내 계획에서 여전히 벗어날 생각이 없는 나.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좋다며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과 행동과는 별개인가 보다.

심리학 개념을 몇 가지 더 아는 것보다 나를 더 돌아볼 필요도 있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나는 게임을 즐겨하진 않지만 가끔 하는 모바일 게임들이 있는데,

그중에 '블록 없애기 게임'이 있다.

규칙은 간단하다.

1. 8x8의 모눈칸과 랜덤 블록들이 세 개 주어진다.

2. 원하는 위치에 블록들을 배치한다. 한 줄을 다 채우면 그 줄에 있던 블록이 사라진다.

3. 세 블록을 모두 배치하면 새로운 블록 세 개가 다시 주어진다.

4. 최대한 많이 블록을 없애는 게 목표!


이 게임을 잘하려면 최대한 빈틈없이 촘촘하게 블록을 배치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랜덤으로 등장하는 다음 블록이 무엇이냐에 따라 더 놓을 공간이 없어서 게임오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긴 블록이 나왔으면...'하고 바랄 땐 그 블록이 나오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다.

나오는 블록에 맞게 즉흥적으로 빠르게 블록을 배치해야 한다.

그래서 점수가 가장 잘 나오는 비법은 모양이 일그러지더라도 한 줄을 채울 수 있을 때 빠르게 채우는 것이다.

이 게임은 그래서 우리 삶과 좀 닮았다.

다음에 이런 블록이 나오겠지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보다 닥치는 대로 잘 대응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계획하고 기대하다 정작 눈앞의 한 줄을 채울 기회를 놓치곤 한다.


우리는 언제나 다음 블록을 예측하려 하고, 다음 역을 미리 정해두고 타는 편이 더 안심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예측이 틀릴 때야말로 새로운 점수가 열리고, 새로운 풍경이 열린다.

내 인생의 일탈은 아직 거창하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여기다 싶은 역’이 보인다면 잠깐 내려볼 용기쯤은 내고 싶다.
그게 실패든, 잠시의 우회든, 어쩌면 그게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일탈의 첫 발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 블록판 위에 여백을 남겨두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음 블록이 어떤 모양이든 당황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도록.


KakaoTalk_20251018_222129327_01.jpg 다 없애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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