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진로이론
방학 동안 초등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학원생 신분이지만 1년 만에 선생님 역할을 하게 됐다.
교실에서 오랜만에 교사의 자리에 앉았다.
낯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익숙했다.
아닌가. 익숙하다는 감정보다 편안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텅 빈 교실에서 혼자 하루를 준비하던 그 시간.
교사로 일하던 시기에 유독 좋아했던 순간이다.
창문을 열고, 좋아하는 피아노 음악을 튼다.
메신저를 확인하고 교과서를 준비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일찍 오는 아이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발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누군지 알아챌 수 있게 되는 그 순간이 좋았다.
지금의 나는 대학원생이다.
교육심리를 공부하고, 연구계획서를 쓰고, 분석 프로그램과 씨름하기도 한다.
교사로서의 삶을 잠시 멈추고, 학문이라는 길 위에 올라선 건 분명 내 의지였다.
더 알고 싶었고, 더 잘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런데 교실에 다시 앉았을 때 잊고 있었던 감정이 생각보다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분주한 하루가 시작되기 전, 나만의 리듬으로 준비하던 그 시간.
그게 그렇게 좋았던 거였나?
이 질문은 지난주 토요일부터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다.
‘나는 어떤 순간에 살아 있다고 느끼는 걸까?’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삶의 여러 역할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정체성 탐색(identity exploration)'이라고 부른다. 특히 진로 선택이나 전환의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나 또한 지금, 그 탐색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 교사의 삶과 연구자의 삶, 둘 중 무엇이 더 옳은가를 판단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어떤 자리에 있을 때 더 나답고, 더 충만한가를 알아보는 중이다.
그날 수업 중 아이들에게 "창의성이 뭘까?"라고 물었을 때,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처럼 안 하고, 내 식대로 해보는 거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서는 꽤 오래 울림이 남았다.
내가 요즘 붙잡고 있는 질문도 어쩌면 그거다.
‘내 식대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좋았던 이유는 ‘교사’라는 역할 자체를 좋아했다기보다, 그 안에서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온기를 더할 수 있는 일, 아이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는 감각을 나눌 수 있는 일.
그런 순간들이 생각보다 오래 내 안에 남아 있다.
반대로 대학원 생활은 아직 낯설고 어렵다.
성취는 더디고 혼자만의 시간이 많다.
하지만 그 속에도 내가 원했던 배움과 사유가 있고, 언젠가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교실은 나를 단단하게 해 준 공간이라면, 지금 이 연구의 길은 나를 더 깊게 만들어주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슈퍼(Super)의 생애진로이론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며 여러 직업적 역할을 수행하고, 그 각각의 경험이 통합되어 자아정체감을 형성해 간다고 본다.
교사였던 나, 지금 연구자라는 역할을 사는 나, 그리고 앞으로의 나.
그 모든 내가 모여 결국 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고민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방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정답을 모른다.
무엇이 나를 더 나답게 만드는지,
아마 이 앞머리 같은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있으면 없애고 싶고, 없으면 또 만들고 싶은.
역시 뭐든 익숙한 곳에서는 가라앉고 낯선 곳에서 다시 또렷해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