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기다리는 것

지연 강화

by 뿡어



진주: “돈 냈어요?”
범수: "냈죠."
진주: "아, 돈을 내고 먹는 거였구나. 아무 맛도 안 나길래."
범수: "자, 오늘 먹었으니 이제 경과를 두고 보죠?"
진주: "아니, 뭐 한약 먹은 것도 아닌데 경과를 두고 봐요?"
범수: "이 음식이 그래요. '뭐지 이거?' 하다 다음날 갑자기 생각이 나.
그 때부터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거든."


드라마 <멜로가 체질> 중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평양냉면같은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왠지 처음부터 활활 불타오르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엔 조금 무덤덤해 보여도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나오기 힘든 연애(positive).

그런 연애를 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난 어릴 때부터 비슷한 성향이었다.

마시멜로 이야기를 읽을 때면 엄마는 종종 이렇게 말했는데,
“너는 아마 기다렸다가 마시멜로 두 개 먹는 아이였을 거야”하고.

나는 그말이 좋았다.

덤덤한 척 기다리는 일에 익숙한 아이.

생각해보면 나는 ‘당장 좋은 것’보다 ‘조금 있다가 더 좋은 것’을 고르는 쪽이었다.
당장 눈앞의 흥미보다, 시간이 지난 후의 만족을 믿는 편이었다.


얼마 전 중학교 시절 친구와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다.
내 카카오톡에 ‘오작교’로 저장된 친구.
원래는 본인에게 들어온 소개팅을 나에게 넘긴 친구다.

그 소개팅 자리에 내가 나갔고,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남자친구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말은 공손했고, 리액션은 적당했고.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생각이 났다.

그리고 만날수록 더 더 생각이 났다.

지금은 없으면 안될 것 같은 사람이 되었다.

오작교와 함께 평양냉면을 먹으며 평양냉면같은 나의 연애와, 지금 당장의 자극에 흠뻑 빠지는 게 어려운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심리학에는 ‘지연 강화(Delayed Reinforcement)’라는 개념이 있다. 말 그대로 보상이 즉시 주어지지 않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야 주어지는 강화를 말한다. 쉽게 말해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확실히 좋은 결과가 온다'는 걸 전제로 한 감정의 메커니즘이다. 우리 뇌는 본능적으로 즉각적인 보상을 선호하지만, ‘조금 기다리면 더 큰 만족이 온다’는 걸 아는 사람은 더 안정적인 감정을 유지할 수 있고, 더 깊은 관계를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시멜로 실험이다. 눈앞에 있는 마시멜로 하나를 바로 먹지 않고 기다리면 나중에 두 개를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했을 때, 기다릴 수 있었던 아이들이 나중에 더 높은 자기조절력과 성취를 보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지연 강화는 단순한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속도’를 다르게 조절하는 능력과도 관련이 있다. 당장은 심심하고, 별 감흥이 없고, 잘 모르겠는 사람이나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평양냉면이 처음엔 아무 맛도 없었지만, 며칠 뒤 자꾸 생각나는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가 처음엔 별 감정이 없었지만, 자꾸 곱씹게 되고, 어느 순간 ‘없으면 허전해’지는 것처럼. 지연 강화는 마음이 천천히 익어가는 방식을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다가 갈수록 좋아지고 어느 순간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들.

금방 뜨거워지진 않아도 천천히 따뜻해지는 것들.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그런 것들을 기다리는 사람 같다.


(드라마 속 진주도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되었다)

"근데 감독님 어디가 좋아?"

진주: 같이 있으면 재밌어. 얄미운 짓을 해도 기분이 안 나빠.
찌질한데 귀여워. 기타 잘 치고..노래 잘 하고, 요리 잘해.
대화가 잘 돼. 기분 나쁘게 잘 돼.
의외로 자상하고, 예상대로 부지런해.
밥 먹고 양치 잘 하고 화장실 가면 손도 잘 씻어.
냉면 먹을 때 만두도 먹을 거냐고 꼭 물어봐주고, 냉면은 국물까지 다 먹어.
내가 다 못 먹으면 내 거까지 먹어줘.
안 보이면 걱정돼.
밥은 먹었나 또 술 먹나 걱정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아, 뭐가 이렇게 많아.
자존심 상해.


*지난주 글을 연재책에 발행하지 않아서 다시 업로드합니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5화친구 결혼 소식 들은 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