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약속

몽지아의 진심 어린 조언

by 양작가


바르셀로나에서 파리로 올라오기 전, 부르고스에서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프랑스 순례자 몽지아와 연락이 닿았다.

부르고스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나에게 마드리드 여행에 대한 조언을 해줬고, 마드리드 여행을 마치고 부르고스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나의 여행을 응원해 주었다.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나를 꿰뚫어 보듯 이미 나의 영혼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여행을 다 마치고, 몽지아는 현재 낭뜨라는 도시에서 야간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리고 딸이 깜짝 선물로 함께 마돈나 공연을 보러 파리로 오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 끼 밥을 먹을 여유 있는 시간은 없었지만, 잠깐의 시간을 만들어서 얼굴을 보기로 했다. 스쳐 가는 인연을 소중히 대해 주는 몽지아에게 감사했다. 그렇게 돌아온 프랑스에서, 파리 시내로 나가는 나의 첫 외출이었다.


2년이 지났음에도 어떻게 생생히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때 있었던 이벤트와 사람, 장소를 머릿속 도서관에 파일로 저장된 영화관처럼 느낀다. 바르셀로나를 기억하면 스페인 순례자 친구 마리아와의 추억이 떠오르듯이, 나에게 파리에서의 마지막 추억은 단연 몽지아와 짧지만 굵게 나눈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2023년 11월로 돌아가 몽지아와 나눴던 대화와 파리 바시 역에서 만나 콘서트장 앞 풍경을 구경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다.


2023년 11월 13일 월요일 흐리고 가끔 비 내리는 습한 날씨

2023년 11월 13일 월요일, 날은 흐리고 가끔 비가 내리며 습했다.

오후 5시, 베르시(Bercy) 역에서 몽지아를 만나기로 약속해 오전과 오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산티아고를 가기 전 예행연습으로 걸었던 집 근처 트레킹 코스를 다시 혼자 걷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가을은 한국의 가을 날씨와 몹시 비슷했다. 신선하고 습한 자연의 향이 온몸 가득 전해져, 여행으로 지쳤던 나의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듯했다. 오전 시간을 동네 트레킹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시내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처음 가보는 동네로 향하는 길이었다.



지하철 타고 Bercy 역 가기

오늘은 파리 시내에 있는 Bercy(베르시) 역으로 향했다.

Gif-Sur-Yvette역에서 RER-B선을 타고, 이제는 익숙한 루트대로 Denfert-Rochereau(덩페르 로슈로) 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탄 후 Bercy에 도착했다. 일드프랑스 앱이나 구글 지도보다, 손에 익은 이 경로가 훨씬 편하다.


Bercy는 신축 건물과 아레나 경기장, 전형적인 프랑스풍 레스토랑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이곳엔 각종 공연과 스포츠 경기를 여는 아레나 경기장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 몽지아가 마돈나 콘서트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나는 프랑스에도 ‘마돈나’라는 이름의 가수가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미국 팝가수 Madonna임을 알고 혼자 웃었다.


이곳은 한국으로 치면 잠실 주경기장쯤 되는 분위기다.
커다란 건물들과 경기장 주변엔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파리 물가

Bercy역에 오기 전까지, 나는 9월에 구매해 두었던 까르떼(Carnet) 20장짜리 종이 티켓으로 파리 시내를 다녔다.


가격도 저렴하고 유효기간도 없어서, 여행객에겐 꽤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가 스페인에 머물던 10월 한 달 사이, 파리는 올림픽 준비로 분주해지며 도시 곳곳에 새로운 기기와 공공시설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 사이 교통요금도 올랐다. 종이 티켓은 더 이상 판매되지 않았고, 티켓 한 장당 1유로가 넘게 가격이 올라 있었다.


이제는 충전식 교통카드를 사용해야 했는데, 까르떼 대신 쓰는 **일주일 정기권(내비고 패스 Navigo semaine)**의 단점은 무조건 일요일에 리셋된다는 점이다. 월요일마다 다시 거의 30유로 가까운 금액을 충전해야 했다.


문제는 내가 남은 기간 동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얼마나 이동할 것인지 예측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사용하지 못한 요금은 고스란히 손해로 이어진다.

남은 파리 체류 기간이 길지 않다 보니, 빠르게 오르는 물가가 체감되었고, 자연스레 지출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서트 전야

몽지아를 만나기 전, Bercy 역 주변을 돌아보다가 프랑스 마돈나 팬클럽을 위한 굿즈샵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했다.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주변은 점점 붐비기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몽지아와 만나 우리는 콘서트장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한 달 만에 나누는 반가운 인사였다.


저녁식사는 생략했지만, 핫초코와 크레페로 간단히 허기를 달래며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았다.
왜 산티아고로 향했는지, 한국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묵혀 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산티아고 길을 걷기 전, 나는 마음속에만 감춰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곳에서는 만난 이들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고,
이제 파리로 돌아와서는 그런 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콘서트를 기다리는 인파로 거리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나는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몽지아의 조언

몽지아는 인생 선배답게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삶에서는 언제든 넘어지고 실수하는 일이 생기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털고 일어나 걸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카페는 시끄러운 분위기와 마돈나 팬들의 흥분으로 더욱 소란스러워졌지만,
몽지아가 전해준 진심 어린 조언만은 내 가슴속에 깊이 남아
마지막 유럽 여행 내내 두고두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순간들 중 하나가 되었다.


요즘처럼 모두가 하소연하기 바쁜 세상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작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작별

우리는 부르고스에서 두 번 만났고, 이후 파리에서도 약속을 했지만
길게 함께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쉬움을 뒤로하고 Bercy 역에 도착했다.

Bercy 역에서 몽지아의 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진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몽지아는 오늘 콘서트를 본 뒤 몽펠리에나 다른 지역으로 간호사 출장을 떠날 예정이다.

수많은 이별과 만남 속에서도, 삶은 계속 흘러간다.

낯선 이방인인 나에게 선뜻 마음을 열어준 몽지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또 만나요.”

아비앙또(À bientôt. 프랑스어로 ‘또 만나요’)



연착 열차

몽지아와 헤어진 후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가끔 RER-B선의 종착역이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있다.

늦은 밤 환승역은 전 세계 관광객과 퇴근하는 파리지앵들로 여전히 붐볐다.

신설된 보기 편한 지하철 안내기기가 생겼다고 해도, 파리 지하철 속도가 하루아침에 빨라지진 않았다.


간혹 정차선이 변경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늦은 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만원 지하철에 올랐다.

장문의 안내방송을 들었어야 했는데, 프랑스어를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결국 B선도 한참 만에 도착했고, 변경된 정차선인 Bures-Sur-Yvette역에서 내려 한국 1호선처럼 반대 방향으로 갈아타야 했다.


시외 지역인 프랑스 밤길은 조명이 거의 없고 주택들만 있어 꽤 어둡고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나처럼 더 가야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눈치껏 지하철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서 기차를 기다렸다.

막차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마지막까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겨우 Gif-Sur-Yvette역에 도착했다.

언니에게는 미리 저녁 약속을 알려둔 상태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집도착

산티아고 완주 후, 프랑스로 돌아와 언니네 집에서 머물며
다시금 일상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쉼’이라는 공간을 프랑스에서 가질 수 있었다는 것,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한국에 돌아온 이후를 돌아보면,
가장 묵묵히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도와준 사람은
언니였다는 생각이 든다.

삶 속에
“다시 오고 싶은 추억이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
그 자체로 내 여행의 참 좋은 마무리가 되었다고 믿는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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