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오늘도 달리는 중이다.
‘엄마, 오빠가….’로 시작된 딸의 전화는 스마트폰을 쥐고 있던 왼손이 뜨거워져서야 끝났다.
살다 보면 갑자기 무섬증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요즘 사위가 그랬나 보다. 출퇴근하던 장모가 집에 있으니, 뉴스에서 보던 장면이 떠올랐던 거다. 홀로 집에 계시다 쓰러진 어른들 모습이 어른거려 마음이 불안해졌단다. 장모님을 위해 ‘홈 카메라’를 설치하자는 사위 말에 딸은 당황해 나에게 전화한 거다. 딸은 ‘Heavy 딱지 붙은 여행 가방’과 ‘생수 뚜껑 따기’를 힘들어하는 엄마이긴 하지만…. 사위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흥분했다. 감히 뒤태 미인 엄마를 노인 취급했다고.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딸을 나는 다독거렸다. 흥분 지수 상승한 딸 앞에 죄인처럼 고개 숙였을 사위가 짠하고 고마웠다. 딸은 엄마가 늙어간다는 걸 부정하고 싶었을 테지만. 사위는 혼자 있는 환갑 지난 장모님이 신경 쓰였을 거다. 둘의 넘치는 사랑에 난 애교 섞인 말투로 요즘 근황을 알려줬다.
지난주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광고를 보고 나는 옆 동네 복지센터를 방문해 신청했다. 도자기 공예를 하고 싶었는데 참가자를 모집한다니 너무 좋았다. 일주일에 2회씩 6주 하는 프로그램이다.
며칠 전 화요일 오후 1시 수업 시작 13분 전, 12시 47분에 강의 장소인 경로당 2층에 들어선 난 깜짝 놀랐다. 그 동네에서 힘깨나 쓸 어르신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동네 이장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청해 준 거라며 위엄 있게 앉아계셨다. 분명 60세 이상 어르신들은 신청하라고 했는데. 어디를 봐도 80세 이상인 분들만 계셨다. 어디서 왔냐고 묻는 말씀에 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우리 집 주소를 말하며 출입문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코로나19 전까지 ‘치매 예방프로그램’으로 진행해 온 프로그램이 란 걸 난 그날 알았다. 코로나19로 멈췄던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는 거라는 행정복지센터 담당 직원 인사말과 함께 ‘컵 만들기’ 수업이 시작됐다. 컵을 만들기 위해 뭉쳐진 흙을 사각형으로 미는 동안 여기저기서 ‘선생님!’을 부르는 어르신들 목소리가 난 정겨웠다. 6주 동안 함께할 동네 어르신들 틈에 앉은 난 초등학생처럼 들떠 도자기 선생님 대신 내가 대답할 뻔했다. 난 들뜬 마음을 애써 누르며 수업에 참여했다. 예산이 많이 들어간 수업이니 빠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담당 직원 인사와 잘 가라는 어르신들 인사를 뒤로하고 두 번째 수업인 ‘촉촉 보습 스킨 만들기’까지 마무리했다. 난 다음 주 화, 수요일을 설렌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6주 동안 함께할 어르신 친구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내 손으로 만들 작품들이 기대되기도 해서다.
어르신 친구들 사진을 받아본 딸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은 친구들이라면서 웃었다. 그런 딸에게 이틀 동안 선생님 심부름은 젊은 내가 했다며 어깨 힘을 잔뜩 준 채 자랑했다. 난 딸에게 '아직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말과 함께 뜨거워진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자신의 DNA를 이 세상에 남기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큰 열망이다.’라고 했다.
나 또한 큰 열망과 욕심으로 날 닮은 딸을 이 세상으로 데려왔다. 요즘 같은 장마철엔 서로에게 짜증을 내다가도 해가 쨍쨍한 날 해넘이를 보면 같이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손을 잡으면 내 손에 쏙 들어오던 딸이 이젠 자기와 닮은 남자 손을 잡은 채 나를 업으려 한다. 딸과 사위에게 조금이라도 가벼움을 주기 위해 난 출렁이는 뱃살 정리도 하고, 사귄 지 이틀 된 친절한 어르신 친구들과 손가락 움직이는 수업도 재미있고 신나게 해야겠다. 내가 지금보다 많이 가볍고, 눈이 흐릿해질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나에게 그런 시간이 닥치면 난 참지 않고 딸과 사위에게 업어달라 하겠다. 우연히 신청한 프로그램 덕분에 같은 교실에서 수업받고 있는 어르신들도 그들 곁을 떠나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자녀분들 등에 업힐 시간이 나와 같이 멀리멀리 있길 바라며 '어르신 친구들 다음 주에 만나요.'라고 인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