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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뱃살공주 Oct 23. 2024

서랍 깊숙이

내뱉다. 내팽개치다. 작파하다.

골목엔 가로등이 3개다. 두 번째 가로등을 지나 전봇대가 서 있는 모퉁이를 돌면 오른쪽 세 번째 대문이 우리 집이다. 두 번째 가로등을 지난다. 내가 모퉁이를 돌기 전 무거운 책가방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긴다. 모퉁이를 도는데 누가 날 껴안는다. 손에 든 가방이 땅에 떨어진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내 귀엔 ‘어서 달아나!’로 들린다.

날 안은 사람 손이 내 교복 안으로 파고든다. 히드라가 혀를 날름거리며 날 칭칭 옭아맨다. 그대로 나는 얼어붙는다. 내 목구멍 안에서 ‘어~ 어’하며 알아듣기 힘든 소리가 울린다. 내가 몸을 흔들며 수영선수처럼 팔다리를 휘적인다. 끔찍해 몸부림치던 난 비 맞은 생쥐 꼴로 눈을 떴다. 꿈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산 아니, 기억 깊숙이 숨겨둔 일이 꿈에 나타났다. 

내가 고3 가을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골목에 숨었던 ‘바바리맨’이 나를 힘껏 안았다. 난 숨이 막혀 아무것도 못 했다. 겨우 숨만 쉬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몸을 비틀어 흔들었다. 숨길이 꽉 막혀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정신을 잃고 땅으로 쓰러진 것도 같았다. 놀란 그 남자는 내게 속사포 쏘듯 심한 쌍욕을 날리고 후다닥 도망갔다.

요란한 발소리에 전봇대 아랫집과 대문을 마주한 집 개 두 마리가 짖었다. 이어 온 동네 개들이 합세했다. 개 짖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집 저집 어른들이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고 소리쳤다. 시끄러운 소리에 첫 번째 집 아저씨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날 보더니 뛰어왔다.

“아이고! 옆집 학생이 넘어졌네. 개새끼들이 짖어서 놀랐구나.”

날 일으켜 주려 했지만, 난 아저씨 손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책가방을 오른손으로 들었다. 교복 치마를 왼손으로 ‘툭툭’ 털며 겨우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저씨.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늦도록 책상에 앉아 ‘바바리맨’을 향해 내가 아는 온갖 악담을 다 퍼부었다. 아니 저주를 쏟아내고 노트 한쪽에 ‘죽일 놈’이라고 기록까지 했다. 

나는 그 후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혼자 걷지 못했다. 우리 집 근처를 지나가는 옆 반 친구와 동행했다. 내가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로 옮기기 전까지 함께 걸었다. 친구들과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하던 내가 그 일 이후 조금씩 변했다. 주말이면 낮이고 밤이고 주구장창 잠만 잤다. 학교에선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면 내 몸은 거북이 등딱지처럼 딱딱해졌다. 재잘대던 입은 마치 실로 꿰맨 듯 벌어지지 않았다.

입을 벌리면 그 일이 온갖 욕설이 되어 쩍 벌어진 이빨 사이로 튀어나올 듯했다. 난 닫힌 입 대신 가슴속 서랍에 검은 개를 키웠다. 나는 서랍에 갇혀 짖어대는 검은 개를 방치했다. 내가 사람들 속에 있을 땐 잘 숨어있다가 고요한 순간 검은 개는 내 심장을 두드렸다.

‘네 귓속을 파고든 쌍욕과 등 뒤로 들어오던 손은 내가 먹어버렸으니 이젠 잊어. 네 잘못이 아니니깐 숨 쉬고 살아.’

그 일을 꿈속에서 다시 마주친 건 어제 집 앞 마트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을까? 난 어제저녁 내내 잠들지 못하고 힘들었다. 아파트 주변 둘레길을 걷고 난 후 동네 마트를 갔었다. 마트 마감 시간이 다 되어서인지 물건 고르는 손들이 바빴다. 이튿날 아침 국거리용 콩나물을 들던 내 손이 두부를 집으려는 누군가의 손을 쳤다. 놀란 내가 말없이 고개 숙여 그에게 죄송하다 인사한 후 과일 판매대로 이동했다. 걷는 내 등 뒤로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쳤으면 사과는 해야지. 저러니 아줌마들은 집에 있어야 해.”

“맞아. 사과는 기본이지. 나잇값 못하는 몰상식한 사람이 많아.” 

그들 대화를 들은 내가 뒤돌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감 시간이라 제가 고개만 숙이고 갔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딸 또래쯤으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하! 그래서 그게 사과하는 표정입니까?”

그 말에 발끈한 내가 해선 안 되는 말을 하고 말았다. 

“도대체 몇 살이세요?”

“왜요? 나보다 나이 많으면 답니까? 나도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나이는 왜요?”

둘 중 한 명이 내 앞으로 상체를 내밀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기세등등한 그 모습에 당황한 나는 자라목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마트 직원이 정리하던 물건을 팽개치고 달려왔다. 그들과 나 사이에 끼어 말다툼을 말리는 직원에게 미안했다. 마트 안 몇 안 되는 사람들 눈빛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부끄러웠다. 손에 들고 있던 콩나물을 어디인가에 던져버리고 얼굴이 벌게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동안 나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그들도 내 말과 행동에 아팠을까. 나는 마음이 불편해 거실을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다. ‘어이구 인간아, 어른이면 어른답게 조심 좀 하지.’ 목구멍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공기 중으로 이내 사라지지만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은 말들이 오랜 시간 사람을 아프게 한다. 내 행동과 말들이 기병의 창끝처럼 날카롭게 그들 심장을 쑤셨나 보다. 난 그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생각과 어른답지 않은 내 태도가 속상했다. 난 그들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나는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새벽이 돼서야 잠이 들었다.

꿈으로 서랍 속 검은 개가 튀어나왔나 보다. 기억에서 지워지길 바란 묵은 상처가 마트 일로 자극받았나. 난 바위에 붙은 따개비를 떼듯 삼킨 눈물로 멍울을 긁어낸다. 상흔에 굵은소금을 뿌린다. 나는 쇳소리가 나도록 울다 진물이 흐르는 가슴속 더께에 소독약을 바른다. 서랍을 열어 검은 개를 쓰다듬는다. 서랍을 나서는 검은 개가 나를 되돌아본다. 손을 흔들어 떠나보내던 난 빈 서랍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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